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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맞닿은 DMZ는 일촉즉발의 데드라인이다. ⓒNarongsak Nagadhana/Shutterstock

우리는 절체절명 두 개의 운명선(運命線)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해를 통해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통로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맞닿은 155마일 DMZ와 동-서 NLL 해상경계선이다. 남해 통로가 수출입과 원유 수입 루트인 생명의 젖줄이라면, 북쪽 라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죽음이 예고되는 데드라인(Dead Line)이다.

이 데드라인에서는 정말 무시무시한 동존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2015년 8월 4일 발생한 DMZ 북한 지뢰 도발로 우리 측 하사 두 명의 다리가 잘리고 발목이 절단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또 13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칠 때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경비정이 넘어와 이를 차단하던 우리 고속정 357호에 선제 포격을 가해 고속정은 격침되고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렇듯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북한의 대남적화전술은 현재진행형이다.

 

광화문에 있는 장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북한 지뢰 도발 현장에 있었던 수색대대 정찰병들은 갑작스런 지뢰 폭발음과 치솟는 먼지에 “적 폭탄 투하!”를 외치면서 두 명의 부상자를 신속하고도 안전하게 남방 한계선 안쪽으로 조치했다. 위기의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순발력이 튀어나온 것은 평소 다져놓은 전우애(戰友愛)와 숙달된 훈련의 산물일 것이다. 국민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위기 조치 능력이 뛰어났던 이들 수색대 병사들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북한의 GP를 박살내고 싶다”는 군인들의 용감무쌍한 자세는 곧 이순신 장군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 부상당한 젊은이들의 앞날은 어찌할꼬?” 장군은 세 아들과 세상을 일찍 뜬 두 형님의 조카들 6명을 끔찍이 아끼던 분이었다. 광화문에 서있는 장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현장의 위기 조치 능력은 탁월했으나 군 지휘체계는 다소 미흡함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8월 4일 목함지뢰 도발이 있은 후 4일 만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일촉즉발 DMZ의 엄중함을 생각한다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사망자가 없었고 부상자만 있어서 그렇게 미온적으로 대응한 것인가?

범죄이론 가운데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둑에 난 작은 구멍이 나중에 둑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으로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는 우리 속담과 엇비슷하다. 이번에 목함지뢰 도발→대북방송 개시→북한 평사포, 곡사포 사격→우리군 155㎜ K55 자주포 응사→북한 전군 준전시상태 선포 및 방송시설 타격 시점 발표→한미연합사 강력 응징 표명→남북한 초긴장상태 유지→북한 대화 제기 및 군사 행동 등 양면작전(兩面作戰) 돌입→극적인 협상 타결의 프로세스만 보더라도 익히 알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100-1=0’다.

 

광화문수호신(크기변환)

광화문 한복판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 ⓒ김동철

 

최고 지휘부가 오판하면 나라는 어떻게 될까

한반도는 1953년 6·25전쟁 이후 지금껏 휴전(休戰) 상황이다. 그래서 안보 컨트롤타워의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이 곧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구도다. 다음은 왕과 조정의 최고 지휘부가 오판(誤判)을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다.

왜란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590년(선조 23년) 조정은 우의정 류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일본 정세와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다. 그 이듬해인 1591년 3월에 귀국한 정사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은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필경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래구(來寇, 왜구가 침입함)할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담과 지략이 있는 자”라고 했고 김성일은 “가는 쥐 눈을 가지고 있어 두려워할 위인이 못된다”고 아뢰었다.

왕에게 복명(復命)을 마치고 나온 김성일에게 류성룡이 “만일 병화(兵禍)가 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나도 어찌 병화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정사의 보고에 중앙과 지방의 민심이 놀라 동요할까 걱정돼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동인→북인), 좌의정 정철(鄭澈, 서인), 우의정 류성룡(柳成龍, 동인→남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따라서 동인 김성일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이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허성(許筬)은 동인이었지만 ‘왜의 낌새가 이상했으므로’ 서인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했다가 동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뻔했다.

서인 정철은 1589년 기축옥사(정여립의 난) 때 옥사(獄事)의 위관(委官)으로 3년 동안 동인 세력 1000여 명을 대거 참살시켜 동인의 미움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동인의 협조를 구해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강성(强性)’ 정철도 못이기는 척 동인의 뜻에 따랐다. 그야말로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사심(私心)이 작용했던 셈이다.

북로남왜(北虜南倭), 북쪽 여진과 남쪽 왜구를 미개한 오랑캐로만 치부하던 선조와 조정의 오판(誤判)으로 강토는 7년 동안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또 농지는 거의 황폐화됐고 먹을 것이 없어 인육(人肉)을 먹기까지 했다.

선조실록 1594년 1월 17일 기록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 서로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있는 살점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 듣기에 너무 참혹합니다.”

또 호남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성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명나라 군사들이 술을 잔뜩 먹고 가다가 길 가운데 구토하는 것을 보고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머리를 땅에 박고 토사물을 핥아먹었다. 그나마 힘이 미치지 못한 사람은 밀려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의 폐해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비참한 것이다.

 

북한의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군 장교 두 명(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맞아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북괴 도끼만행 사건’이다. 미군 측 4명과 우리 장병 4명 등도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즉시 북한을 쓸어버릴 태세로 본토와 해외 주둔 군사력을 한반도로 집결시켰다. 6·25전쟁 후 처음으로 전투 준비태세인 ‘데프콘3’가 발령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때 보고를 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긴급 투입됐고 주변에 불법으로 설치된 북한군 초소 4개를 깡그리 부숴버렸다. 화들짝 놀란 김일성은 긴급 사과 성명을 발표해 북한 정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궤멸 상황을 막았다.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집적거리고 강하게 나가면 꼬리를 내려 호시탐탐 훗날을 노리는 게 북한의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이다.

백골부대(3사단) 박정인 사단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이상으로 대응한 장군이었다. 1973년 3월 7일 비무장지대에서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 측 군인들에게 북한군이 기습사격을 가해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박 사단장은 포병대대를 동원해서 북한 GP와 후방 지역에 포사격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북한은 아무런 대응도 못했다. 이 일로 박 사단장은 옷을 벗어야 했다. 1972년 남북 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작전 통제권을 미군이 가진 데다 일개 사단장이 함부로(?) 북한을 공격하면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적은 도발하면 상을 받고 우리는 맞대응하면 벌을 받는다’는 학습효과는 꽤 오랫동안 일선 지휘관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랬었지. 확전(擴戰)을 걱정하는 건 참 군인이 아냐.”

2002년 6월 29일 연평해전이 있기 전 대북 통신감청부대에서는 북의 공격 기도를 감청해 국방부에 보고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뒤 “이젠 전쟁 걱정이 없어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햇볕정책으로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돼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은 북한이 NLL을 침범해도 먼저 쏴서는 안 되는, 이상한(?) 교전수칙을 지켜야 했다. 그 결과 우리 해군 용사들은 만신창이(滿身瘡痍)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당했다.

연평해전 다음날인 6월 30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일본의 월드컵 폐막식 경기장에 붉은 넥타이를 맨 모습으로 나타났다. 억울하게 당한 6명의 해군 영웅이 펼친 ‘잊혀진 전투’가 실전(實戰)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것은 13년 만이었다. 그것도 십시일반(十匙一飯) 민간자본에 의해 영화로 환생한 것이다.

당시 영결식장에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중 어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해군장(海軍葬)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영웅들은 전사자 대우도 못 받고 순직자로 처리됐다. 당시 군인연금법에 전사자가 법률로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만~5,000만원의 사망보상금만 받았다.

참고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족들은 전 국민의 관심과 성원으로 성금 모금만 1,300억원이 넘었고 희생자에게도 최고 10억원이 넘는 보상금이 지급되는 것과 비교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 목함지뢰 사건으로 다리를 자르는 등 중상을 입은 하 하사와 김 하사에게 LG그룹이 위로금으로 10억원을 내놨다는 뉴스가 유일한 낭보(朗報)였다.

당시 서해에선 북의 공격으로 죽고 다친 유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는데 동해에선 많은 국민이 북의 금강산으로 놀러가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 후 햇볕정책을 이어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으로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의 전투상황이 줄이어 일어났다.

“뭐 이런 나라가 있단 말인가.”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 기국비국(其國非國)이라.”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으니,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

1582년 율곡 이이(李珥)는 왜란의 조짐이 있는데도 국론이 갈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사라진 조선의 해이한 상황을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그렇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