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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을 든 일본군 모습. ©Marzolino/Shutterstock

일본의 목표, 조선을 넘어 명(明)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군대는 ‘항왜원조(抗倭援朝)’, 즉 ‘왜를 쳐부수고 번방(藩邦)인 조선을 돕는다’는 기치로 압록강을 넘었다. 그 빌미는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며 조선에게 길을 비켜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친 일본이 제공했다.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총(鳥銃)을 사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가공(可恐)할 만한 신무기를 활용, 마침내 1590년 8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무너뜨려 전국통일을 이뤘다. 한때는 주군(主君)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원숭이’라고 놀림 받았던 농민 출신 하급무사였던 히데요시는 1582년 암살 당한 주군의 뒤를 이어 일본 60개 주를 병합하여 통일을 완성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오사카성. ©Taki O/Shutterstock

전국통일을 이룬 히데요시는 휘하 다이묘(大名)들의 주체할 수 없는 힘을 조선과 대륙 진출로 돌림으로써 그들에게 영지(領地)를 나눠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히데요시는 대외적으로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했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그래서 조선에게 ‘정명향도(征明嚮導)’와 ‘국왕입조(國王入朝)’의 명을 내렸다. 정명향도(征明嚮導)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 데 앞장서라’는 뜻인데 일본 사신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조선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고 판단해서 조금 낮은 단계인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나라 들어가는 길을 빌려달라’로 순화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국왕입조’는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것이어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조정은 ‘수로미매(水路迷昧)’, 즉 ‘물길이 어두워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없었던 통보’로 무시해버렸다.

일본의 속셈은 일단 조선 침략이었다. 조선이라는 후방기지를 확보하고 조선에서 군량과 군사를 동원해서 가칭 ‘일조(日朝) 연합군’으로 명나라를 친다는 구상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의 일이지만 강화회담에서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이 명나라만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592년 6월 9일 평양 대동강 강화회담에서 조선 대표 동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이 일본 대표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와 승려 덴소(玄蘇)에게 주장했던 내용이다.

“귀국이 만약 명나라만을 침범하려 했다면 어찌 저장성(浙江省)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습니까? 이것은 실로 조선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입니다.”

히데요시가 중국을 직접 치러갈 마음이 있었다면 그 길은 류쿠(琉球, 오키나와) 열도를 통해 바닷길로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저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등 명나라 동해 연안지역으로 직접 가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 바닷길은 이미 14세기 이전부터 왜구와 중국 해적들이 수시로 지나다니던 안방과도 같은 곳이었다.

 

위기의 조선, 전선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극진히 섬기던 존명사대(尊明事大)의 조선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본 측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1592년 4월 13일 15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해 부산포에 기습 상륙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대포진과 부산진성(첨사 정발, 鄭撥)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에 도착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에게 ‘전즉전 부전즉 가도(戰則戰 不戰則 假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달라’는 팻말을 내보였다. 그러나 부사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보이자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선발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동래성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일본은 조총을 ‘뎃뽀, 철포(鐵砲)’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철포가 없었으므로 ‘무(無) 뎃뽀’ 정신으로 막다가 모

두 순절했다.

 

전쟁 초기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 일본의 조총. ©김동철

초전부터 승기(勝氣)를 잡은 왜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면서 당대 조선 명장이라는 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도순변사 신립(申砬)을 충주에서 격파했다. 두 차례 방어전에서 모두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선조와 조정은 4월 30일 혼비백산(魂飛魄散),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와중에 황급히 보따리를 싸서 한성을 빠져나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1, 2군은 상륙 20일 만인 5월 3일 하루 차이로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서 한성에 무혈입성했다. 이어 개성을 거쳐 전쟁발발 60일 만인 6월 14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5월 7일 평양으로 피난 왔던 선조는 왜군이 승승장구(乘勝長驅) 압박해오자 6월 11일 그곳을 떠나 영변으로 내달렸다.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비참한 운명이 되었다.

 

몽진 중에 불타는 한성을 바라보는 선조. KBS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주자의 성리학에 빠져 ‘소중화(小中華)’를 꿈꾸던 선비의 나라는 학문적 분파(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에 따라 동서 양당으로 나뉘어진 상태였는데, 피난길에서조차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했다.

“암, 적과 싸움에는 등신(等神)이었고 우리끼리 싸움에는 귀신(鬼神)같았지….”

이 못된 분열의 DNA로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고 여전히 정치권은 여야(與野)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천보서문원(天步西門遠) 나라님 행차는 서쪽 관문으로 멀어지고
동궁북지위(東宮北地危) 동궁께서는 북쪽 변경에서 위험에 처해있다.
고신우국일(孤臣憂國日) 외로운 신하는 날마다 나랏일 걱정하네
장사수훈시(壯士樹勳時) 장사들은 공을 세울 때이다.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산들에 맹서하니 초목이 알아준다.
수이여진멸(讐夷如盡滅) 이 원수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
수사부위사(雖死不爲辭) 비록 죽을 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

1592년 6월 17일 이순신 장군은 적진포해전에서 왜선 13척을 분멸(焚滅)시키고 돌아오던 중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으로부터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군은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며 통분한 심경을 토해냈다. 왜군에게 쫓기는 국왕에 대해 장군은 멀리서나마 군신유의(君臣有義), 충직한 단심(丹心)을 진중음(陣中吟)으로 읊었다.

 

명(明), 입술이 사라지면 이가 시리다

사실 명나라는 임진왜란 한 달 전인 1592년 3월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푸베이(哱拜)의 난 때문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왜군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워낙 빠르게 북상하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밀접한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조정은 왜란 발발 직후 이덕형(李德馨)을 명나라에 청원사(請援使)로 보내서 원군(援軍)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1592년 6월 15일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선발대 35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왜군을 우습게 본 나머지 7월 17일 평양성 전투에서 고배(苦杯)를 마시고 말았다.

그해 12월 푸베이의 난을 평정한 총병관 이여송(李如松)은 4만 명의 군사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이듬해 1월 6일부터 9일까지 최신 대포로 평양성을 포격해 비로소 탈환했다. 승리에 도취한 이여송은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1월 27일 고양 벽제관(碧蹄館) 부근 여석령에서 왜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고 개성 이북으로 퇴각했다. 조선의 혹독한 정월 추위와 전염병, 보급마저 끊겨 굶주림에 지친 왜군은 2월 12일 행주대첩에서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대패배한 뒤 5월 18일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점차 전의(戰意)를 잃어가던 왜군은 “조선이 그렇게 넓은 땅인 줄 처음 알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왜군은 총 15만 7900명이 상륙했는데 1년여 만에 7만여 명이 죽어 병력 손실률이 46%나 됐다.

 

여진, 기회를 엿보는 신진세력

뜬금없이 북방 여진족이 조선을 돕겠다고 나섰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17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부(兵部)가 요동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다. 그 자문에는 이번에 여진(女眞)의 건주(建州)에 사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이 하는 말에 따르건대 ‘우리들의 땅은 조선과 경계가 서로 연접해 있는데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 노아합치(奴兒哈赤, 누루하치, 1559~1626) 휘하에 원래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도독(都督)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위엄찬 화를 내어 정병을 뽑아 한겨울 강(江)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왜노를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조정 대신들은 “이 고마운 말과 충의가 가상하여 그들 말대로 행하도록 윤허(允許)함으로써 왜적의 환란을 물리치고자 하나 단지 오랑캐들의 속사정은 헤아릴 수가 없고 속마음과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선뜻 준신(準信)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논의 끝에 ‘없었던 일’로 끝냈다. 하지만 선조는 북로(北虜) 여진의 누루하치 세력도 견제해야 했다. 그래서 누루하치에 대한 회유책으로 백두산 근처 산삼을 여진족이 캐가더라도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

 

신흥 세력인 여진족은 얼마 후 후금을 세우고 조선을 침탈한다. 영화 <활>의 한 장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은 6월 17일 함경도 변방까지 올라가 여진족과 충돌이 있었다. 그야말로 북쪽 오랑캐인 북로(北虜)와 남왜(南倭)의 대결이었다.

1592년 7월 1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다. “가토(加藤淸正)가 마침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너 깊숙이 노토 부락(老土部落)까지 들어가 성을 공격하니 호인(胡人)이 사방에서 일어나 요격하여 사졸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이에 진로를 바꾸어 종성(鍾城)의 문암(門岩)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협로를 따라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이 난리 통에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변고(變故)가 생겼다. 7월 23일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왜군에 부역하는 순왜(順倭)인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에게 넘겨졌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간 두 왕자는 현지 백성을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리는 등 망나니짓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렇듯 조명연합군과 왜(倭)가 부딪칠 때 누루하치는 호시탐탐 조선과 명나라를 노렸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대신할 중원(中原)의 패자(覇者)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