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학교 양극화 치유의 길

 

학교는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고스란히 닮았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自畵像)’을 그대로 베껴놓은 듯 하다.

‘가진 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더 부유하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이른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마테복음 효과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장소로서의 역할, 즉 올바른 시민성(citizenship)을 체험하는 학습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떠들면서 전화를 받는 행위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매너를 가르치는 인성교육은 입시교육에 가려져 있다. 다문화 가정, 새터민 가정, 장애우 가정, 조손가정, 한부모 가정 등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함께, 같이 살아가는 교육과 함께 나보다 못한 남과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훈련이 이뤄져야 하는 도장(道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지금 난장판이다.

교사, 학생,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갈 길을 잃은 채 끝없는 방황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러 학원을 다니면서 선행학습을 통해 1점이라도 더 따려는 공부벌레들과 공부를 팽개친 채 폭력과 왕따 가해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진들이 기억될 뿐이다. 이들 일진은 일찌감치 폭력고리에 얽혀있다는 것 외에 대체로 가정형편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고 따뜻하게 맞아줄 부모, 형제들도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성적의 양극화, 부의 양극화, 힘의 양극화 현상이 학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괜찮은 가정환경에 공부도 잘 하면서 일진에 가세해서 약한 친구를 짓밟는 얌체족까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은 꼼수가 판치는 이 사회의 치졸한 한 단면이다.

교육이 개인의 소질과 잠재능력을 개발해서 그 분야에서 최고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국영수 성적만으로 줄 세우는 기존의 입시 교육은 과감히 타파돼야 할 것이다. 현재의 입시교육으로는 일등이 한 명밖에 안 나오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다양한 분야를 향해서 각자 간다면 일등은 수십명, 수백명이 나오게 마련이다.

잘못된 허세(虛勢)의 가치관이 판을 치고 있다. 더군다나 출세의 사다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절망감에 학부모들은 학교를 출세의 장으로 간주, 빚을 얻어서라도 사교육을 시키고,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꼴을 볼 수 없는 과열 상황을 빚어낸다.

물론 이렇다 할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으로 정치 민주화, 산업 선진화를 이룬 것은 이런 치맛바람의 긍정적인 영향이 일부 미쳤을 것이라는 데 동의를 한다.

그러나 그 치맛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국제적인 망신을 벌이고 말았다. 자녀의 국적을 세탁해 외국인학교에 입학한 한국학생들이 무더기로 적발된 것이다. 자녀의 국적을 남미 온두라스, 니카라과로 성형해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킨 학부모 중에는 재벌 그룹 전 회장 며느리, 재벌 회장의 딸, 병원장 부부, 대형 로펌 변호사 등이 포함돼 있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탈법을 일삼고 있는 부패공화국이다. 외국인 학교는 전국에 51곳이 있는데 그 중 33곳이 수도권에 있다.

또한 고교시절 장애학생을 성폭행한 사실을 숨겼다가 결국 명문대 입학이 취소된 학생의 경우, 고교 때 담임은 추천서에 ‘인성이 좋고 봉사를 많이 한 학생’이라고 기술했다가 발칵된 것이다. 그야말로 ‘내 자식만 잘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천박한 부모들의 교육열이다.

교육의 본래 목표가 무엇인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발견해서 그 분야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식과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아이들은 학교 가는 게 즐겁지 않고 학업이 짐으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뉴욕의 ‘작은 학교’를 벤치마킹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공교육을 되살리기 위해서 마련한 ‘작은 학교’는 재학생 중 90%가 소수 민족인 히스패닉계와 흑인들이다. 하지만 교사 1인당 17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기 때문에 인근 공립학교의 평균 졸업률(46%)에 비해 84%로 높은 편이다.

세계적인 부호(富豪)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빌&멜린다 게이츠재단’이 출연한 기금 5120만 달러(575억 원)가 씨앗이 돼서 123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작은 학교는 교장 희망자가 학교 운영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뉴욕시가 심사해 개교 허가를 해준다. 수학, 과학, 음악, 문학, 스포츠 등의 특성화 교육 학교이다. 졸업 후 취업에 목표를 둔 다른 특성화 학교와 달리 대학 진학 후 전공 선택에 초점을 맞춘다. 100명 안팎의 학생들과 교사들과의 인사 등 스킨십 또한 이뤄져서 인성교육에도 이바지 한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것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인사성 교육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일선 학교에 NIE(신문활용교육) 특강을 갔을 때 외부인 또는 외부 강사에 대한 교사와 학생들이 보인 인사태도는 높은 점수를 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수업을 하기 전에 항상 반장을 먼저 찾았고 인사를 주도하도록 시켰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먼저 한 뒤에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게 교육의 기본이 아닌가 하는 신념(?)에서 였다. 사회생활에서도 낯선 방문객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게 되어있다. 필자는 동료와 상사는 물론, 남에게 인사를 잘 해서 성공한 사람을 꽤 많이 알고 있다.

시각 장애인이자 전 미연방정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였던 강영우 박사의 말을 빌려보자.

“미국에서 한국계 학생들이 소위 아이비리그라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해서 낙제율도 제일 높다고 한다. 몇 해 전 하버드 대학에서는 낙제하는 동양계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놀랍게도 낙제생 10명 중 9명은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한 한국계 학생이었다.”

하버드대학교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학생에게 ‘Nothing! Long term life goal’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즉 인생의 장기목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계 학생들에게 최고의 목표는 하버드대 입학이었다. 그런데 막상 하버드 대학을 정복하고 나서 사춘기에나 겪어야 할 심각한 방황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 이유는 과정 목적만 있고 이상 목적, 즉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교대상, 경쟁대상만 있고 성취목적, 성취대상은 희미하다는 설명이다.

미래의 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은 창의, 인성교육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할 것이다. 즉 정답을 달달 외워서 맞추는 ‘정답주의’ ‘주입식교육’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창의성과 대인관계의 협동성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82%에 육박한다. 대학 진학률이 높은 것은 교육열에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잘못된 사회풍토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을 앞두고 맞선을 볼 때 으레 ‘어느 대학 몇 학번’을 따지는 사회에서 대학문턱에도 가보지도 못한 축은 그야말로 루저(loser), 실패자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벌이 인격을 좌우하는 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냥’ 가는 곳이 대학이 되었다. 그런데 정치권의 논리대로 반값 등록금을 한다면, 그 또래에 어떤 이유에서건 대학을 안 가고 산업전선에 뛰어들거나 자영업자인 자신들이 낸 세금을 반값 등록금으로 쓰는 것에 과연 동의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1년에 1000만 원까지 내고 대학을 꼭 가야 하는 나라, 그리고 몇몇 명문대를 제외하고는 명함도 못 내미는 이런 나라에서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면 너도나도 대학으로 몰리는 ‘공짜 심리’가 발동될 터이다.

한영수 경기과학기술대 총장이 밝힌 의견을 들어보자.

“독일은 젊은이의 36%만 대학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취직을 하며 학력에 대한 편견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젊은이의 80%가 대학에 가야 사람 구실하고 출세할 수 있다는 사회적 편견에 빠져 있다. 요즘 화두로 떠오르는 반값 등록금 문제 또한 이러한 ‘과잉 학력’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4년제 대졸자의 44%는 취업을 못하니 이들이 등록금이 비싸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반값 등록금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전문성과 실력을 갖추지 않은 대학생을 양산하는 현 교육 정책을 바꾸고 실용 중심의 고교와 대학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근래 정부가 마이스터고,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제2고교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러나 뿌리깊은 학력위주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취업에만 전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先) 취업, 후(後) 진학’ 방안이 필요하다. 즉 마이스터고, 특성화고-특성화 대학-기업으로 이어지는 직업교육 경로가 확립되면 학력 인플레의 거품이 빠져 청년 실업도 줄어들고 국가 산업인력 구조도 튼튼해질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마이스터고에 이어서 ‘마이스터 대학’을 도입하는 것이다. 산업 분야에 따라서는 고교 과정만으로 부족할 수 있으니 고교와 전문대를 통합한 5년제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볼 만하다.”

‘신(神)도 모른다’는 대학의 교직원들. 이들이 하는 일에 비해서 받는 혜택이 과분하다고 느끼는 필자로서는 신성한 상아탑(象牙塔)이 이제 더 이상 부모들의 등골을 빼는 ‘우골탑’(牛骨塔)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익자 부담(受益者 負擔)의 원칙에 따라 공부를 더 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대되는 반대급부(反對給付)에 따라 자기 돈으로 교육투자를 더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학벌주의가 만연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정서 때문에 대학 문턱에 가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주눅들어서는 안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처럼 이제 세계적인 분위기는 상생과 협동, 배려, 사회적 책임이 더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는 때이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무한 경쟁과 탐욕의 자본주의 3.0을 시험무대에 올려놓고 메스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Street)!'라고 외치는 데모가 미국 뉴욕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온 대안이 상생, 동반성장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4.0이다.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인 자본주의 3.0이 세계 경제성장에는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반대편의 치유하기 힘든 그늘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타임즈의 저널리스트인 아나톨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4.0이다. 가난한 사람도 같이 더불어 살아가자는 복지의 개념이 강하다.

이처럼 어느 하나의 절대 진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별 처한 상황과 환경 조건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면서 지속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이득이 없다면 그 제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절대진리일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4.0이라는 새로운 상생(相生)패러다임이 전세계에 유행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얼마만큼 제한하면서 지속될 것인지가 관전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