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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음서제(蔭敍制)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됐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왕족, 공신, 고관대작의 친인척들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리로 등용되는 특혜를 누렸다. 고려 때 음서제도는 5품 이상의 아들, 손자, 외손자, 사위, 동생, 조카까지 적용되었지만 조선은 공신과 정2품 이상만 허용했다. 그야말로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집안에 출세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

 

부와 명예 권력의 세습, 최고의 스펙은 아버지 재산과 지위

광화문의 전광판 뉴스는 연일 국감(國監)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10대 재벌 회장 가운데 자수성가한 사람은 단 1명, 카카오톡 김범수 회장뿐, 나머지는 상속자.’ ‘외국의 경우 10대 재벌 가운데 2~3명 정도는 재벌 상속자이나 나머지는 자수성가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Born with a gold spoon in one’s mouth)’은 일단 그 능력을 떠나 부(富)의 세습이란 ‘대물림 프리미엄’을 톡톡히 본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이 그렇고 강남 대형교회에서도 심심찮게 세습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좁은 땅에서 무한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다 보니 혈연, 지연, 학연 등 끈이라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찾는 게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정서가 됐다. 자녀들은 아버지라는 천륜(天倫)을 적극 활용하는데 이 시대 최고의 스펙은 ‘아버지 재산과 지위’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판 음서제의 든든한 ‘뒷빽’이 된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세상이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사라지는 시대에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잃은 젊은 세대들은 미천한(?) 부모를 원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법고시 출신이라는 끼리끼리 소수 엘리트 순혈주의(純血主義) 방지와 고시 낭인(浪人)을 막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로스쿨 변호사들의 일탈도 심각하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의 활동을 종합평가해 검사나 법관으로 임용한다는데 힘 있는 아버지와 인사권자와의 인연, 학연, 지연, 혈연 등은 등용문(登龍門)의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로스쿨에 자녀가 입학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소위 ‘로(Law)사부일체(師父一體)’로 불린다.  특혜를 받아온 ‘로사부일체’의 실태를 <PD수첩>이 파헤쳤다.

최근 로스쿨 출신 딸에 대한 취업 특혜로 논란이 된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 정식 공고도 없이 아버지의 배경으로 네이버에 낙하산으로 채용됐다는 의혹이다. 기업 측에서는 정식 채용이 아닌 교수 추천 채용이라고 답했는데, 제작진이 확인한 결과 해당 로스쿨에서 교수 추천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양쪽의 주장이 엇갈리는 상황, 과연 누구 주장이 맞는 것일까?

최근 자녀 취업 관련 이른바 ‘갑질 의혹’이 제기된 새누리당 김태원 의원과 새정치연합 윤후덕 의원에 대해 여야가 앞 다퉈 진상조사에 나섰지만 결론은 맥빠진 ‘제식구 감싸기’로 끝났다. 국회의원 불신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전히 ‘국회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국회가 부정부패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다면 감사원이라도 제 역할을 해야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최근 감사원에 채용된 로스쿨 출신 변호사 4명 중 3명이 감사원 고위직, 여당 인사의 자녀로 특혜 의혹’ 급기야 감사원에서 일이 터진 것이다.

 

관피아 농단(壟斷)에 민란(民亂) 일으키는 청년 세대

늘 광화문 전광판 뉴스를 바라봐야 하는 이순신 장군의 입에서 탄식이 연발했다.

“오호 통재(痛哉)라! 감사원이란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같은 곳이고, 감사란 왕의 특명을 받아 암행(暗行)하던 어사(御使)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왕의 눈을 가리고 백성의 피폐한 사정에 눈을 감는단 말인가.”

‘영혼(靈魂)이 없다는 공무원’의 무능을 없애겠다며 몇 년째 주요 보직에 일반인 공모제를 시행했지만 결과는 대개 공무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민간인 지원자는 ‘들러리’였던 셈이다.

농촌진흥청은 최근 5년 간 9명의 개방직을 채용했는데 모두 공무원 출신으로 드러났다.  또 직원 자녀 5명을 계약직으로 채용했다가 슬그머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줬다. 한국건강관리협회가 최근 5년 간 전·현직 임직원의 자녀와 친·인척 50명을 무더기 채용했다. 구속됐던 농협의 전 회장 2명이 계열사 고문으로 재취업해 월급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농협 이사장 아들의 농협대 입학 및 농협 취직 문제도 의혹으로 떠오르고 있다. 관피아의 농단(壟斷)! 어둠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같은 마각(馬脚)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취업난에 지친 이른바 ‘7포 세대’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hell 朝鮮)’이라고 부른다.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뜻이다. ‘망한민국’ ‘개한민국’이란 자조어를 쓴다. 헬조선 세대들은 심지어 “죽창을 달라!”고 외친다. 가히 가렴주구(苛斂誅求)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들고 일어났던 민란(民亂) 수준급이다.

노조는 또 어떤가? 청년실업은 가중되는데 일부 기업과 노조원들이 직원 자녀들에 대한 ‘고용세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국감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노사간 단체협약에서 총 11개 기업의 고용세습 조항이 발견됐다. ‘이태백’ 청년들의 뿔이 날 만도 됐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나타내는 역사는 질기고도 오래됐다. 성경 마태복음 13장 12절이다.

‘무릇 있는 자는 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1986년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이 말에서 힌트를 얻어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마태복음 효과(Mattew’s Effect)’라는 사회경제심리학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기심은 이렇듯 인간의 본질적 DNA다. 양극화의 원인은 여기에 있는데 그렇다고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는 문제가 더 꼬일 수 있다. 세계적인 부호 빌 게이츠가 주창한 ‘착한(또는 창조적) 자본주의’는 고사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상피제(相避制), 음세제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한 통의 장계를 올렸다. 당시 광해군은 전주에 조정의 분신인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고 하삼도(下三道)의 무과시험을 실시하려 했다. 그런데 장군은 왜군과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수군을 빼서 바닷길로 전주까지 올라가 무과시험을 치르게 할 수 없다는 주청을 올렸다. 서인 윤두수(尹斗壽) 등은 감히 일개 변방 장수가 건방진 소리를 한다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의 협조를 얻어 가까스로 승낙을 받았다. 1594년 4월과 1596년 윤8월 한산도 진중에서 무과 별시시험의 과장(科場)이 마련됐다. 이때 97명의 부하들이 홍패(紅牌)를 받았다. 그러나 늘 장군과 전장에서 함께했던 친자식과 조카들은 단 한 명도 합격자가 없었다. 장군의 세 아들 회(28세), 열(24세), 면(18세)과 큰 형님 희신의 아들 뇌(34세), 분(29세), 번(20세), 완(16세)과 둘째 형님 요신의 아들 봉(32세), 해(29세) 등은 장군의 막하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순신 무과합격교지(변환)

1576년 32세 나이로 무과시험에 급제한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가 내린 홍패 교지. ⓒ김동철

난중일기 기록이다.1594년 4월 초6일 맑음.
“별시를 보는 시험 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구사직(具思稷),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 황세득(黃世得),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이다.”

 

1594년 4월 초8일 맑다.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시험관이나 참시관도 모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인 장군의 동료이거나 수하장수였음을 상기한다면 장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능히 해낼 수도 있었을 터이다.

1596년 윤8월 10일.
“과장(科場)을 열었는데 면이 쏜 것은 모두 55보, 봉이 쏜 것은 모두 35보, 해가 쏜 것은 모두 30보, 회가 쏜 것은 모두 35보, 완이 쏜 것은 모두 25보였다. 진무성(陳武晟)이 쏜 것은 모두 55보로 합격했다.”

당시 무과 합격 기준은 철전, 편전, 기사(騎射) 등 활쏘기가 주 종목이었다. 그러나 아들 면이 쏜 것도 55보, 진무성이 쏜 것도 55보였지만 아들 면의 합격 소식은 없다. 1598년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6명의 조카 4명 중 분은 문과에, 완, 봉, 해는 무과에 각각 급제했다. 그리고 장남 회는 장군이 연전연승의 승전고를 올리면서 종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자 음보(蔭補)에 따라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한산정 활터 (변환)

한산도 진중 무과시험에는 144m 거리의 바다 건너 과녁을 맞추는 과목이 있었다. 한산정 활터 모습. ⓒ김동철

 

조선시대에는 상피제(相避制)가 있었다. 이 제도는 세종 때 성립되었는데 음서제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인사제도였다. 가족이나 친족이 같은 관청에 근무할 수 없게 했고, 서로 연관 있는 직책 등에 아는 사람이 근무하지 못하도록 했다. 특히 시험감독인 고시관(考試官)이나 법을 다스리는 청송관(聽訟官) 등 거의 모든 관직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막내아들 면이 불합격된 것은 합격, 불합격을 떠나 그냥 ‘시험 삼아’ 과거를 보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난중일기1596년 8월 21일.
“식사 후 활터 정자에서 아들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말 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1596년 윤8월 5일
“사청(射廳)에 가서 아들들이 말 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나 엄격한 문관과 달리, 무관의 경우 구례(舊例)에 따라 아들에게 시험을 응시하게 해서 벼슬을 주던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장군과 악연으로 유명한 원균(元均)이 그랬다. 1563년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元俊良)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일 때 그는 아들 원균을 무과 초시에 응시케 한 일이 있었다.

사인(舍人, 정4품) 최옹(崔翁)이 아뢰기를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일은 지금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한데,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구례대로 응시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인은 또 “곽흘과 이택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그중에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원준량은 갖가지로 재물을 긁어 들여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 날마다 파직되어 가기만 고대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尹元衡, 문정왕후 동생) 등이 일찍이 그의 뇌물을 받았기에 파직되어 갈릴까 염려되어 이렇게 임금을 속여 아뢰었으니 앞으로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