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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김동철

돈으로, 끈으로 관직을 훔친 세도정치의 시대

세도(勢道)정치가 위세를 떨치던 19세기 말, 영국 왕립지리학회 소속 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1831~1904년)는 조선을 네 차례 여행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1894년 저서 <한국과 이웃나라들>로 풀어냈다. 이 책은 조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관직에 임명 받으면 나라 월급 축내고 뇌물 받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하층민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조세, 군역, 환곡 등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국가 운영의 공백이 발생했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백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렸고 도탄에 빠져들었다.

순조 때 안동 김 씨 김조순(金祖淳)과 헌종 때 풍양 조 씨 조만영(趙萬永), 철종 때 안동 김 씨 김문근(金汶根) 일가는 득세한 외척으로서 국가 권력을 사유화(私有化)했다. 언필칭(言必稱) 주워 삼키던 백성은 그들 안중에 전혀 없었다. 외척의 발호를 어느 정도 척결한 흥선대원군이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사건으로 청나라에 납치되자 명성황후 일파인 여흥 민 씨는 또다시 세도정치를 펼쳐 나라가 망할 때까지 친인척 1000여 명을 관직 곳곳에 배치했다.

1811년(순조 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고 1862년 진주농민봉기가 있었으며 피를 토하는 크고 작은 아우성은 급기야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정점에 달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제압한 흥선대원군은 ‘서양오랑캐와의 통상수호거부의지’를 전국 곳곳 척화비(斥和碑)에 밝혀놓았다. 청나라는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고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및 일본은 호시탐탐 썩어가는 나라를 엿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나라에 망조(亡兆)가 들자 온 나라에 망초(亡草)가 뒤덮였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땅도 국운이 쇠하는 것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이권을 탐하는 권력자들은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통해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대거 배출했다. 등용된 탐관오리들은 돈을 내고 자리를 샀으니 본전을 뽑으려 백성의 고혈(膏血)을 쥐어짰다.
일찍이 정조 때 개혁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썩었어도 내 나라”라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개혁 의지를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담아놓았으나 그 금쪽같은 혜안(慧眼)은 책속에 파묻힌 채 좀이 슬어갔다.
“오호 통재(痛哉)라! 망할 나라가 망한 것이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재조산하(再造山河)’의 뜻을 가슴에 품었던 이순신 장군에게 탄식이 그칠 날이 없었다.

 

현대판 탐관오리, 전관예우 변호사들

국가권력을 배경삼아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는 탐관오리들. 그들의 욕심을 읽다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 즉 반복되는 역사의 데자뷔(deja vu)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오늘날 전관예우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부정부패는 ‘관피아’로 분류되는 이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특히 ‘이적행위’인 방산비리도 따지고 보면 ‘군피아’들이 벌이는 끼리끼리의 전관예우 집단범죄행위다.

법조윤리협의회가 ‘미선임 변론’으로 징계를 청구한 서울중앙지검장 출신 최모(53세) 변호사의 사건 7건 중에는 15차례 마약을 투약하고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논란이 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사위 이모(38세) 씨 사건도 포함됐다. 최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19일 마약 투약 혐의로 서울동부지검에서 수사를 받던 이 씨의 변호인으로 선임됐고, 그 직후 구속기소된 이 씨는 올 2월 6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초범이 아닌 상습 마약투약 혐의자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는 것은 법조계 상식에 어긋나는 이례적인 판결이다.

그런데 선임계를 내지 않고 사건을 수임해 이른바 ‘몰래 변론’을 한 전관(前官) 변호사가 추가로 적발됐다. 서울 지역 지검장을 지낸 임모 변호사에 대해서도 법조윤리협의회가 대한변협에 징계를 청구했다. 임 변호사는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고 건설회사의 내사사건, 개인 형사사건 등 5건을 변론해 수임료 1억2000여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5건 모두 수임과 동시에 세금 신고를 마쳐 세금을 탈루한 부분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미(未)선임 변론은 현행 변호사법 29조(수사기관이나 재판부에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은 변론 활동 금지)에 대한 명백한 위반 행위이고, 전관예우를 비롯한 각종 법조계의 병폐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변협의 징계 대상이 된다. 법을 떡 주무르듯 하는 법 전문가들이 ‘몰래 변론’을 선호하는 것은 뭔가 감추어야 할 ‘구린 데’가 있기 때문이다.

두 변호사는 공직에서 퇴임한 지 2년이 되지 않은 ‘공직 퇴임 변호사’로서 수임 사건을 해당 지방변호사회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방변호사회는 법에 따라 이 사건들을 법조윤리협의회에 보고하는데, 협의회가 두 변호사의 수임 사건 목록과 선임계를 대조하는 과정에서 ‘몰래 변론’을 한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변호사 시장의 소득 양극화

거물 전관의 ‘몰래 변론’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위급 전관에게 “나 원래 선임계 안 내는 거 알지? 사건 잘 부탁해”라는 전화를 받은 후배 법조인은 부탁을 매정하게 끊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훗날 어떤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는 전관이기 때문이다.

한 법조인의 설명이다. “전관예우는 현직 판·검사인 내가 선배 전관을 잘 봐주면 나중에 내가 전관이 됐을 때 후배들이 나를 잘 봐주는 세대 간 중첩(Overlapping Generation) 구조다.” 지금 당장 보상을 받지 않고 나중에 ‘이연(移延) 뇌물’의 형태로 받는 교묘한 부패행위라는 것이다.

변호사법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미(未)선임 변호 활동을 할 경우 1000만원 이하 과태료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게 전부다. 그야말로 전관예우의 당사자들에겐 ‘껌값’이다. 전관예우의 위력은 전관 변호사를 사는 ‘몸값’에서 잘 나타난다. 사건을 수임하는 첫 수임료만으로 대법관 출신은 최소 1억원,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은 5000만원 이상, 검사장 출신은 5000만∼1억원의 돈을 받는다. 다른 변호사가 쓴 대법원 상고이유서에 전직 대법관의 도장을 받는 데만 3000만 원이 넘게 든다 하니 그 위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전관예우 타파에 소극적이던 변호사 단체들이 지난해 5월 ‘안대희 낙마’를 전후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안대희 당시 총리 후보자의 5개월 동안 16억원의 수임료는 보통의 변호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이라며 “만약 안대희 전 대법관이 법정에 출석하지도 않으면서 고액의 수임료를 받았다면 이는 전관예우로 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변호사 단체가 전관예우 척결을 외치는 주된 이유는 변호사 시장에서의 소득 양극화 때문이다. 안대희 전 대법관처럼 잘나가는 전관이 연간 수십억원의 수익을 올릴 때 신참 중에는 변협 회비조차 내기 어려운 변호사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대한변협은 전관예우 척결을 위해 상징적으로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 개업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최근 차한성 전 대법관은 변협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수임 제한 기간인 1년이 지나자마자 변호사 개업을 선언했다. 또 변호사 개업 대신 부인의 편의점 일을 도와 국민을 감동시켰던 김능환 전 대법관마저 재작년 9월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됐다. 이런 마당에 제주 중앙로 길가에서 음란행위를 해 물의를 빚은 끝에 사직한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의 변호사 등록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재벌과 대형 로펌이 고위직 전관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셔가는 마당에 젖과 꿀이 흐르는 기득권을 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 고시 패스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한다

지난 7월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후 형사사건의 성공보수 약정은 전부 무효가 된다”고 밝혔다. 그동안 변호사는 수임료 외에 성공보수금이란 보너스를 받아왔다. 재판 법관과의 인연이나 로비 능력이 재판의 성공 여부에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형사사건에 있어서 과거 고위 판·검사 출신을 선임하는 주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건 담당 재판부와 친분 등으로 사건의 주장과 진행이 편의한 점
둘째, 청탁을 하거나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점
셋째, 과거 판·검사 경력으로 형사사건의 쟁점 파악과 진행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점

위와 같은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의뢰인 입장에서는 고위직의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돈으로 사서 재판에 승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전무죄(有錢無罪)요,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나오게 됐다.

‘벤츠 여검사’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른바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내년부터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영란법’이 공직자의 부패 척결을 위한 고육책(苦肉策)이라면 전관예우금지법도 이번에 확실하게 손을 봐야한다.

‘한 번 고시 패스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한다’는 좌우명(座右銘) 때문일까. 오늘도 로스쿨에 들어가려는 수많은 수험생들과 공무원시험에 목을 매는 공시족(公試族)들이 넘쳐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결국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의 자격자(갑)가 되려는 것이고 확실한 신분 보장이 된다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학교 전공과는 무관하게 너도나도 공무원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다. 이 시대에 진로 적성, 창의 교육이 물 건너 간 지는 너무 오래됐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의 공직관은 어땠을까. 이조판서 이율곡(李栗谷)이 류성룡(柳成龍)에게 “이순신(李舜臣)이 덕수 이 씨로 같은 집안인데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평생 장군의 ‘멘토’였던 류성룡이 이조판서 만나기를 권했을 때 장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같은 문중으로서 만날 수는 있겠으나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에 있는 한 만날 수 없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와 같은 장군의 인생관은 다음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장부출세(丈夫出世) : 세상에 장부로 태어나
용즉효사이충(用則效死以忠) : 나라에 쓰이면 충성을 다할 것이며
불용즉경야족의(不用則耕野足矣) : 쓰이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약취미권귀(若取媚權貴) : 권세와 부귀에 아첨하여
이절일시지영(以竊一時之榮) : 이(권세와 부귀)를 도둑질하여 일시적으로 영화 누리는 것은
오심치지(吾甚恥之) :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1576년(선조 9년) 32세 늦은 나이로 식년무과에 급제한 뒤 함경도 동구비보 말단 권관(종9품)으로 임명받기 전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권세와 부귀에 아부하지 않겠다는 젊은 날의 기상과 배포가 돋보인다.

1597년(정유년) 2월 26일 장군은 삭탈관직하고 한성으로 압송당해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했다. 부산포에 상륙하는 제1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쳐부수라는 선조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從賊不討 負國之罪)였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나서 구명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장군은 백의종군길에 올라 경상도 초계 도원수 권율(權慄)의 진영에 머물렀다. 장군의 전관은 삼도수군통제사(지금의 해군참모총장)였지만 여느 병사와 똑같이 채소밭 사역에 동원돼 무밭에 씨를 뿌렸다.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에서 고문 받는 모습.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 권율의 진영 채소밭에서 사역하는 모습.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