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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풀벌레 우는 소슬한 가을밤이 깊어갈수록 어머니는 진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뿌리의 원천, 세상에 내놓은 생명의 젖줄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온갖 세파에 시달릴 때마다 회귀하고픈 곳은 바로 어머니 젖가슴이다. 어머니는 천지(天只), ‘오로지 하늘’처럼 그 품이 넉넉하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노래한 윤동주 시인은 별을 안식(安息)의 고향으로 상정했다. 그런 애틋한 안식의 어머니가 이순신 장군의 가슴에도 오롯이 각인돼 있었다.

1589년 10월 류성룡은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후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14년 만에 현감이 된 장군은 평소 마음의 빚을 갚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두 형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의 아들인 조카들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 초계 변 씨와 두 형수 및 조카와 아들, 종 등 모두 합쳐서 24명의 가솔(家率)을 데리고 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식솔을 데려간다며 ‘남솔(濫率)’ 즉 가속(家屬)을 많이 데려가는 것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이 충무공 행록이다.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듣는 이들이 의롭게 여겼다.’

진나라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나타냄이다. 그야말로 측은지심 인지발야(惻隱之心, 仁之發也)다. 다음은 류성룡의 징비록 내용이다.

이순신의 두 형 희신과 요신은 다 그보다 일찍 죽었다. 이순신은 두 형의 어린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출가시키고 장가보내는 일도 반드시 조카들이 먼저 하게 해주고 친자녀는 나중에 하게 했다.

큰형님 희신의 아들 뇌, 분, 번, 완과 둘째 형님 요신의 아들 봉, 해를 친아들 회, 열, 면보다 먼저 장가를 보냈다. 모두 어머니를 향한 효심(孝心)일 터이다.

 

장군의 효심, ‘이충무공자당기거지(李忠武公慈堂寄居地)’ 비석

‘효(孝)’ 자를 파자하면 ‘노인(老)’을 ‘아들(子)’이 업고 있는 형상이다. 1576년 32세 늦은 나이로 무과 급제 후 22년 동안 북로남왜(北虜南倭) 오랑캐를 방비하느라 변방생활을 하던 장군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난중일기>에 100여 차례나 절절하게 술회했다. 어머니 초계 변 씨(1515~1597년)는 일찍 두 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먼저 보낸 뒤 의지할 곳이라곤 실질적 가장(家長)인 셋째 순신(舜臣)뿐이었을 것이다.

1589년 왜란의 조짐이 보이자 당시 선조는 비변사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시국에 비춰 대장이 될 만한 현재(賢材)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동인인 우의정 류성룡(柳成龍)과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 등은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 두 사람을 추천하였고, 판부사 정탁(鄭琢)은 이순신,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3인을 추천했다. 서인인 영부사 정철(鄭澈)은 이억기(李億祺),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당일에 추천된 이는 모두 7인이었다. 1월 21일 비변사에서 시행한 품계를 넘어서 발탁되는 이른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이었다.

그리하여 장군은 1591년 2월 진도(珍島)군수로 임명됐지만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사로 제수되었다. 이는 조정에서 정읍현감(종6품)에서 진도군수(종4품)로, 군수에서 가리포첨사(종3품)로 순서를 밟아서 승차시킨 거였다. 변경과 소읍을 전전하던 장군은 드디어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당상관인 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사람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무려 7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이 되다보니 대간에서 논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간원에서 아뢰었다.

선조실록 1591년 2월 16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서 아직 (진도)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超受, 뛰어넘어 제수하는 것)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직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그러나 왜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선조는 “지금은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 규슈정벌과 1589년 오다와라성을 평정하면서 전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조선과 대륙정벌의 꿈을 꾸고 있었다.

1592년 정월 초하루,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禹臣)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명절 때가 되면 더 더욱 부모형제가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날 장군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부터 걱정했다. 1592년(임진년) 5월 4일은 어머니 생일이었다.

1592년 5월 4일
“오늘이 어머니 생신날인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찾아뵙고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될 것이다.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말로 다하랴.”

어머니의 생신날 장군은 군관 송희립(宋希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장군과 동명이인),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 제장들과 함께 옥포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1차 출정하는 날이었다. 장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먼동이 틀 무렵 여수 좌수영을 출발, 경상도 거제지역으로 왜적을 찾아 나섰다. 마침 5월 4일은 일본군 15만 대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해 한성에 무혈입성한 즈음이다.

이런 상황이니 어머니의 생신상을 제대로 차려드릴 수가 없었다. 장군은 한산도로 진을 옮기기 전인 1593년 5월 일흔아홉 살 노모를 전라좌수영 가까운 여수 고음천(웅천도 송현마을) 정대수(丁大水) 장군의 집으로 모셔왔다. 5년 동안 모신 그곳에는 ‘이충무공자당기거지(李忠武公慈堂寄居地)’라는 비석이 서 있어 초계 변 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이순신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순신. ⓒ김동철

효는 만행(萬行)의 근본, 충심으로 이어진 효심

1594년 1월 11일 흐리나 비가 오지 않음
“아침에 어머님을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고음천에 도착했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큰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여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을 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忠)을 이야기하고 아들은 효(孝)로써 어머니를 극진하게 대했다. 효는 만행(萬行)의 근본이다. 장군의 효심은 곧 충심으로 이어졌다. ‘군자행기효 필선이충(君子行其孝 必先以忠)’ 군자는 효도를 행함에 있어 반드시 먼저 나라에 대한 충을 행한다는 충경(忠經)의 말씀대로다.

1595년 1월 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다.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또 80세의 편찮은 어머니 걱정에 애태우며 밤을 새웠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자나 깨나 어머님을 잊지 못하던 장군은 1596년(병신년) 10월 7일 어머님을 위로해드릴 좋은 기회를 맞았다. 82세 된 노모를 위한 수연 잔치를 여수 본영에서 차려드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 모자(母子) 간의 화기애애한 만남이 마지막 정리(情理)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장군은 1597년 2월 선조의 출전명령 거부로 인한 무군지죄 부국지죄(無君之罪 負國之罪)의 죄인으로 한성 의금부에 투옥되고 고문을 받았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을 때 정탁(鄭琢)은 목숨을 걸고 ‘대역지죄인’을 위한 구명 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 상소문(1298자)을 올렸다.

“(상략)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오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므로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오리까.”

이 일로 이순신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행(天幸)이었다.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겨진 장군은 4월 1일 의금부 옥사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오르게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며 걸어서 남대문을 나서 과천, 인덕원을 거쳐 남쪽 도원수 권율의 진이 있는 초계로 향했다. 그야말로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상태였다. 마침내 생가가 있는 아산 부근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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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모습.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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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모습.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아! 어머니 내 어머니!

1597년(정유년) 4월 13일 맑음
“일찍 식사 후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길로 나갔다.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蟹巖, 게바위)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여든셋의 연로한 노모는 험한 뱃길에서 기력을 잃고 아들을 보지 못한 채 그만 숨을 거둔 것이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오던 어머니는 태안반도에 도착하기 전인 4월 11일 배 안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1597년 4월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 하직을 아뢰었다.”

4월 17일 의금부 서리 이수영(李壽泳)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쳤지만 차마 어머니의 영전을 떠나지 못하다가 19일 길을 떠나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장군의 백의종군 천리길은 회한과 눈물로 뒤범벅된 천형(天刑)의 가시밭길이었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떠났으니 꿈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5월 6일 장군의 꿈에 나타난 두 형이 서로 붙들고 울면서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기록했다. 또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