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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의 슬픔 다스리기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9. 20. 14:54

지는 해의 슬픔 다스리기

  • 슬픔 토해내기 
울~고 싶어라 / 울고 싶어라 / 이 마음

 

사~랑은 가고 / 친구도~ 가고 / 모두 다

왜~ 가야만 하니 / 왜 가야만 하니 / 왜 가니

 

‘코털 가수’ 이남이가 불렀던 ‘울고싶어라’ 노랫말이다. 현란한 수식어 없이 수수하고 단출한 게 꽤 강한 전파력을 가졌다. 세상을 향해 ‘왜 가야만 하느냐’고 묻던 그는 2010년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왔으니 되돌아갔다’는 메시지에 그저 묵시적인 동의를 보낼 뿐이다.

사노라면 울고 싶은 때가 많다. 가수 김수희는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며 절규하고 조용필은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면서 구애(求愛)의 손짓을 멈추지 않는다. 실버들은 찬바람이 불면 안구건조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아예 눈물샘이 말라버려 ‘꺼억꺼억’ 마른 눈물을 짜내는 경우도 있다.

슬픈 감정이 들거나 울고 싶을 때 당신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가슴 속에 똘똘 뭉친 슬픔을 토해낼 격발의 방아쇠를 어디서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다. 그럴 때 필자는 글을 쓰거나 영화관을 찾는다. 붐비지 않는 평일에 영화관을 찾아 평소 찜해놓은 영화를 본다. 예를 들어 화요일이나 목요일 오전 수도권 학교 강의가 끝난 뒤 전철을 타고 서울로 와서 환승역 부근의 영화관을 찾는 식이다. 대개 오후 시간대에는 관객이 거의 없다.

최근 <덕혜옹주>를 보러 갔을 때 젊은 여성과 나이든 남성 관객이 전부였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딸인 덕혜옹주의 한 많은 일생을 다룬 근대사극이다. 친일 행적,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시도 등 정치적, 이념적인 구도를 무시해버리고 단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에 초점을 맞춰서 재해석하면 아주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잊힌 여인을 찾아 나선 한 신문기자는 역사를 단죄한다. 선과 악으로. 그리고 조국에서조차 버림받은 덕혜옹주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감싼다. 그것은 휴머니즘의 성공이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펑펑 울자

‘우리네 인생은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남북전쟁을 다룬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 여사가 밝힌 대로 비극적 인생을 보노라면 눈물이 마를 때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눈물을 훔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배출의 쾌감을 가져다준다. 관객은 주인공 속으로 파고들어가 감정이입의 한 몸이 되고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 입장을 이해해주는 동반자 구도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과 함께 대단원의 카타르시스를 함께 느끼면서 흘리는 눈물은 건강에 아주 좋은 요소다. 역사적 비극에 몰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눈물의 양 또한 많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노인.

가끔은 펑펑 우는 것도 괜찮다. 가슴속 슬픔을 한껏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Voronin76/shutterstock

 

어느 친구는 산행을 하면서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내는 데 속이 그렇게 후련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실버 여성은 우울함을 삭이려 노래방을 찾았다가 그만 슬픈 노래만 실컷 부른 탓에 더욱 슬퍼져서 노래방 발길을 아예 끊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50대 갱년기에 들어선 후배의 부인은 슬픈 감정이 북받치면 남편에게 장문의 카톡을 구구절절 써서 보낸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 맺힌 남편에 대한 서운함, 자식들의 속 썩이므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인가. 새로운 것의 창안에 뛰어난 일본사람들은 루이카쓰, 누활(淚活)활동을 이벤트처럼 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인터넷 공지를 보고 모여든 초등학생부터 60대까지 남녀노소가 다 같이 우는 이벤트를 벌여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울음은 확실히 가슴에 맺힌 회한(悔恨)을 날려버리는 데 신통하게도 효과가 있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고통과 동행하는 법을 배울 나이

IT의 발달로 세대 간 정보격차, 양극화의 빈부격차,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과의 물리적, 생리적 차이 및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가중 등으로 이 시대 실버들은 찬바람만 쐬어도 외로움을 곧잘 탄다. 절대고독에 빠진 실버 가운데는 외로움의 심지에 불이 붙으면 이내 다이너마이트 분노로 연결돼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미 일본에서 사회문제로 떠오른 폭주노인(暴走老人)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몇 해 전 홀로 설악산에 갔다가 하산 중 우연히 두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등반을 같이 하게 됐는데 한 여인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

지는 해를 바라보며 슬픔과 동행할 나이임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동행보다는 슬픔을 떠나보내고 싶다. ⓒMikkel Bigandt/shutterstock

 

“자식이 속을 썩이거든 그가 자고 있는 방문 앞에서 매일 108번씩 절을 하라”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부모 속을 썩이는 문제의 골칫덩이가 바로 살아있는 부처, 생불(生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 모셔야한다는 이상야릇한 해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마음을 내려놓음, 즉 하심(下心)의 불가 수행으로 상대를 감격시켜주자는 이야기인 같다. 결국 고통과 슬픔도 친구삼아 보듬고 동행해야 한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거든 주저 말고 엉엉 울어버리자?

그럼에도 슬픔을 맞이하는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보다 슬픔을 떠나보내야 하는 ‘안녕, 슬픔(Adieu Tristesse)’이 더 나을 듯싶다.

 

 

이순신 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