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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의 계절, 결혼이야기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10. 5. 13:27

         

결실의 계절, 결혼이야기

  • 딸의 결혼은 영영 이별?!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결혼식 또한 많아서 축하의 인사가 봇물을 이룬다. 여기저기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고 새로 탄생하는 신랑 신부의 발걸음이 사뿐하다.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은 신혼여행지에서 나비 한 쌍처럼 비로소 허니문을 만끽한다.

최근 친구의 딸 결혼식이 있었다. 사회자의 “신부(新婦) 입장!”이라는 소리에 신부는 아버지의 손을 살포시 마주잡고 등장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위에게 포옹한 뒤 딸의 손을 내어주었다.

결혼식장에서 손을 잡은 아버지와 딸.
가을, 결혼 시즌이 되면서 결혼식장에 자주 찾게 되었다.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는 아버지를 보면서 딸 가진 아버지로써 얼마나 섭섭할지 짐작이 되었다. ⓒGregory Johnston/Shutterstock

나는 이 순간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할지 자못 궁금해졌다. 곱게 키운 딸을 사위에게 건네주는 ‘인계인수’ 때 감정은 나중에 친구에게 물어볼 참이다. ‘시원 섭섭?’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생긴 것은 아마 결혼적령기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뒤늦은 자각 때문일 것이다.

식당 한편 벽에는 신부의 어릴 적 사진 여러 장을 편집한 영상이 펼쳐졌다.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한 발자취였다. 신선한 연출이었다. 한 아기가 부모의 젖을 떼는 때를 이유기(離乳期)라고 한다. 또 부모의 감독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사춘기를 심리적 이유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녀의 결혼은 물리적 이유기가 될 터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가진 ‘딸 바보’ 아빠라면 시집가는 딸에 대한 애틋함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딸 바보건 아니건 줄곧 동고동락하면서 한솥밥을 먹던 식구 중 한 명이 남의 집으로 간다는 사실은 분명 서운한 일일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쉽게 알 수 있는 법’ 딸을 시집보낸 뒤 딸의 방에서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발견되었을 때, 딸이 좋아하던 음식이나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딸의 출가(出家)’를 비로소 실감 하리라.

그런데 오늘날 풍습으로 보면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 집 부근에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혼 후 손주라도 나오면 ‘헬리콥터 맘(자녀 주위를 맴도는 어머니)’이 손주 양육까지 책임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그 옛날 시집가는 딸이 저 멀리 바다 건너, 또는 산 넘고 물 건너 가는 시절이 아니기에 그 서운함은 훨씬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내인 필자는 1970년 전후 형수들의 결혼식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시골에서 서울로 시집온 형수들은 친정에 자주 가지 못했다. 시집이라는 대가족의 낯선 환경에의 적응과 아들, 딸 낳고 기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지만 친정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서야 부랴부랴 친정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선하다. 당시 시집을 간다는 것은 가족들과 영영 이별로 통하던 때였다.

 

시집말고 장가갔던 우리 조상

전통적으로 ‘시집간다’는 뜻은 남편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 시가(媤家) 즉 시집으로 들어가 산다는 것이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고운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는 혼인 전날까지 딸에게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했다.

또 ‘장가들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자가 결혼해서 장인, 장모가 사는 장가(丈家), 장인집에 들어가 산다는 뜻이다. 고구려 모계사회에서 결혼한 남자는 데릴사위로 처가에 가서 살았다. 농경사회에서 일손을 하나라도 더 붙이는 것이었으리라. 이 풍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데릴사위는 장인집에서 살다가 첫아기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적인 분가(分家)를 했다.

한국 전통 혼례 모습.
조선에서는 ‘장가’드는 풍습도 있었다. 장인의 집에 가서 살다 첫 아이가 태어나면 분가를 하거나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장인의 집에 가서 살기도 했다. ⓒNapoom08/Shutterstock

조선시대 중기의 이순신 가계를 보더라도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씨와 사이에 3남을 낳아 한양 건천동에서 살았다. 그런데 세월만 낚던 아버지는 생활고로 인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급기야 처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순신이 10대 때 일이다. 이순신은 20세 때 아산 부근에 살던 보성군수였던 방진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처가살이를 하면서 3남 1녀를 두었다. 오늘날 아산 현충사 내 이순신 생가터는 그의 처가이다.

혼인과 새악시를 떠올리면 1970년 중학교 시절 안방극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흑백TV 드라마 ‘아씨’가 생각난다. 한 여인의 한(恨) 많고 굴곡진 일생을 담은 ‘여자의 일생’과 같은 드라마였다. 이미자가 구성지게 부른 그 주제가는 아직도 필자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돼 있다. 생각이 난 김에 유튜브에서 다시 들어봤다. 여가수의 애잔함은 절대음감이었고 가사(임희재)와 작곡(백영호)은 더할 나위없이 탁월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노래에 얽힌 추억과 감동은 여전할 뿐이다.

(1절)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2절)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황혼을 맞은 한 여인네가 까마득한 새악시 때를 가물가물 추억하노라니 인생의 덧없음에 섧기만 하다. 어찌 여자의 일생만이 그런 것이겠는가. 감히 말하건대 인생이란 누구나 희로애락 소설 한 권쯤은 너끈히 만들어 낼 추억을 품고 있다. 아무쪼록 멋진 인생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려갈 신혼부부에게 축하를 전한다. Bon Voyage!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