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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사랑에 빠진 할아버지들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7. 13. 07:41

까꿍~ 까꿍~ 술자리보다 즐거운 손주 재롱

그토록 사람 좋아하고 1차, 2차 술자리를 주도하던 ‘폭탄주 사나이’ K 선배는 언젠가부터 며느리의 ‘카톡’을 받으면 나가서 통화한 뒤 곧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아니,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K 선배의 손주 사랑 이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주위사람들이 “손주 보러 가야지요? 1차로 끝!”이 인사말이 됐다.

또 외손녀를 둔 친구 L도 밴드에 손녀 사진을 올려놓는가 하면, 시간 날 때마다 손녀 찾아보기에 열심이다. 자연히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갖는 횟수도 줄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까꿍! 까꿍! 까~까~꿍!”을 연발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지하철이나 모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흥에 겨운 나머지 동영상을 낯선 사람에게까지 보여주며 “귀엽지 않아요?”라며 동의를 재촉한다. 이들의 무한 손주사랑에는 “애를 안 나본 사람은 이 기분 절대 모른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손주의 책읽는 모습에 흐뭇한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은 과거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KBS 방송 중 한 장면. ⓒ김동철

 

자신의 유전적 DNA가 고스란히 옮겨진 후세에 대한 내리사랑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단 한 번의 삶, 그것도 채 100년도 못 되는 짧은 인생에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나’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종족보존 본능에 속한다. 또한 자식에 기대했던 것이 무산되었을 때 손주에게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작용할는지 모른다.

명나라 사조제(謝肇制, 1567~1624)의 <문해피사(文海披沙)>에도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 나온다.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로 하는 일을 적은 대목에서 ‘자불애이애손(子不愛而愛孫)’, 즉 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손주만 사랑한다.

최근 신문에서 할아버지가 쓴 <손주 육아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조부모 세대가 손주의 양육을 책임지면서 이른바 조부모 교육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육아할배’ 이문건

조부모의 손주사랑을 마케팅에 활용한 게 사교육 시장의 학원 원장들이었다.

‘조부모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손주를 명문대학에 보내서 미국 유학이나 삼성전자에 보내 성공시키자는 학원 캠페인이 나왔다. 그래서 과목당 수백만 원짜리 과외가 아직도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

무한경쟁시대에 공부만 치중하다 자칫 인성이 결여된 ‘공부벌레’가 나올 가능성은 다분하다. 또 조부모의 풀지 못한 한(恨)을 손주들을 통해서 대리만족하려다 ‘손주농사’ 망치기 십상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려서부터 인성의 씨앗(충, 예, 효, 정직, 책임, 소통, 배려)을 듬뿍 뿌려주는 것도 멋있는 성공인을 만드는 방편일 것이다.

 

이문건의 양아록.

조선시대에도 ‘육아할배’가 있었다. 이문건은 손자가 16살 때까지 육아일기를 썼다. 위 사진은 육아일기 <양아록>이다. ⓒ김동철

 

16세기 조선시대 때도 ‘육아할배’가 있었다.

‘꼿꼿한 선비’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이었던 이문건이라는 사람인데, 정치적으로 유배의 길에 있었고, 자식 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그에게 기쁨의 빛이 찾아 들었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그렇게 고대하던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본 2대 독자 손자.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다. 이문건은 손자가 처음 태어난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리는 생생하여 과연 궁함이 없다더니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다. 선령이 지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뒤의 일들이 모두 잘 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에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펼쳐져 나 혼자 술을 따르며 경축을 한다. 초 8일에 쓰다.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의 이 모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반드시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고자 하나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다.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하게 홀로 거처한다.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중략) 겸하여 습좌(앉는 법을 배우는 것), 생치(이가 생기는 것), 포복(기어가는 것)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면 글로나마 아마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이다. 가정 30년 신해(1551년) 중추 하현에 이문건이 귀양지에서 기록한다.

할아버지와 동행하는 손주 모습.

나라의 잔치가 열렸을 때 할아버지는 손주들과 동행했다. ⓒ김동철

 

이문건의 육아일기는 손자가 16세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조부모가 세대를 뛰어넘어 손주 교육시키는 것을 격대교육(隔代敎育)이라 한다. <양아록(養兒錄)>은 손자의 성장발달에 관한 기록이다. 병든 아비가 죽자, 이제 겨우 7세인 아이가 서럽게 운다. 10세 때 공부하지 않는 손자를 꾸짖었고 할아버지는 손자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손자 이숙길은 그 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율곡 이이(李珥)가 일찍이 말했듯이 조선은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였다. 즉, 나날이 서까래가 썩어가서 곧 지붕이 무너질 나라였는데 누란(累卵)의 나라를 지켜내겠다고 의병에 투신했다면 이문건의 손자 인성교육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최소한 나라사랑 충(忠)을 실천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