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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모자와 빠케스에 담긴 우윳가루

용산 미군기지가 내년 평택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그러면 서울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커다란 도심 공원이 생길 것이다. 최근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친구 L이 용산 미군기지 내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친구 3명을 초대했다. 철조망과 블럭 담장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미국 땅’이다.

사실 기자 초년시절 미군부대 패스(당시는 하나의 특권)를 가진 지인과 함께 용산 기지의 식당에서 두툼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를 썬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30년이 지난 최근에야 다시 미군부대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친구 L은 초청자 3명을 용산기지 내 드래곤 호텔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그 옛날 먹었던 것같이 두툼한 아메리칸 스테이크는 아니었지만 여하튼 미국에서 직송해 온 쇠고기를 먹는 맛이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수프, 야채샐러드, 팝콘이며 콜라와 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배가 산처럼 불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접시에 담긴 두툼한 스테이크.

용산기지 내 드래곤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두툼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가난했던 유년시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김동철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은 어렸을 적 각자의 기억을 불러냈다.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의 곤궁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당시 버스를 타고 서울 용산이나 이태원 거리를 지나다 보면 ‘헬로모자’(미군이 쓰던 삼각형 모양의 개리슨모)를 쓴 미군들이 젊은 한국 아가씨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높은 미군부대 담장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점심시간 바로 전이면 학급 당번이 ‘빠케쓰’(양동이)를 들고 빵을 타러 갔다. 우윳가루와 옥수숫가루를 버무려서 만든 카스텔라 같은 모양의 빵이었다. 식감은 퍼석퍼석했고 깔깔했다. 그래도 배고픈 시절이라 고소한 빵이 더할 나위 없이 귀했다.

 

6.25 전쟁 후 판잣집 앞에 앉아 있는 노인 모습.

우리나라는 식량난이 해결되기 전까지 곤궁한 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국에서 건너온 원조식량은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Everett Historical/Shutterstock

 

어느 날은 우유와 옥수수 가루가 모자랐던지 멀건 죽으로 나왔는데 학생들은 도시락 뚜껑에 그 죽을 받아서 훌훌 들이마셨다. 또한 딱딱하게 굳어 돌덩이 같은 우유 덩어리를 집에 가져와서 밥할 때 쪄서 먹거나 끓는 물에 타서 고소한 우유를 들이켰다. 빵과 우유를 매일 먹으면 풍요로운 나라, 미국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영양실조 환자가 널려 있었던 시절이라 우유의 단백질과 옥수수의 탄수화물 전분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최소한의 영양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우유와 옥수수는 미국에서 건너온 잉여농산물이었다. 땅 덩어리가 넓은 미국은 농산물 수확이 많은 해에는 적정량 외의 것은 태평양 바다에 쏟아붓는다고 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잉여 농산물을 담은 부대는 태평양을 건너왔고 그 겉면에는 한국과 미국 국기, 양국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미우호식량원조사업이었다. 1970년 중반 통일벼가 생산되어 쌀 막걸리가 나오면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때까지 우리 세대는 배고픔의 군색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위의 세대는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말할 것도 없이 굶주렸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것처럼 미군이 지나갈 때면 “헬로, 기브 미 껌!” “헬로,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쳤고 전쟁고아 가운데는 어린 나이에 얼기설기 만든 나무 구두통을 메고 나가서 지나가는 미군들의 군화를 무조건(?) 닦아주고 “기브 미 마니!”를 외쳤었다. 미군들은 한국의 어린 아이들을 “슈 샤인 보이(Shoes Shine Boy)!”라고 불렀다. 식사를 하는 동안 대충 위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식사 후 포만감을 삭히려 호텔 바깥에서 바람을 쐬다가 곧 헤어져 흩어졌다.

 

용이 못 된 슬픈 이무기의 땅, 용산

용산(龍山)은 남산에서 바라봤을 때 한강에서 나온 용의 모습과 닮아서 이름 지어졌을까.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용산은 Dragon Hill이라기보다 ‘슬픈 이무기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용산이 가진 역사적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단 13세기 후반 몽골의 침략 때 고려 조정은 몽골과 강화를 하였고 몽골군은 전쟁 내내 한강 쪽으로 돌출된 지형에 위치한 남산 남쪽에다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 앞 목멱산(남산) 아래 있는 용산에 왜군이 주둔했었다. 1592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은 숭례문(남대문)을 통해서 한양에 입성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왜장 가토가 한양에 무혈입성한 개선문으로서 남대문이 유명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요즘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에 대한 반론이 일고 있다.

심원정은 삼호정, 함벽정과 함께 용산 한강가의 유명한 세 정자(三亭)이다. 심원정 터에는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碑)가 남아있는데,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심유경과 왜국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조선을 배제하고 강화회담을 벌였던 곳이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는 용산에 진을 치고 기마부대로 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공략했다. 인조는 산성에서 빠져나와 송파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렸다. 청나라 군대는 철수할 때 조선 여인 50만여 명을 포로로 데려갔다고 하니,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붙잡혀갔다 돌아온 조선 여인을 환향녀(還鄕女, 속칭 화냥년)라고 불렀다. 끌려가서 청나라 오랑캐와의 사이에 얻은 자식을 호로(胡虜, 호인 포로) 자식이라 불렀다. 나라 지킬 힘이 약해서 백성들이 당해야 했던 수난사이다.

용산은 근현대사에서도 비극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다급한 조선 정권은 충주로 피난을 가면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원세개(위안스카이)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도 바로 용산이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도 용산이었고 이후 일제시대 내내 일본군 조선주둔 총사령부 등 주요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리고 해방 후 용산의 드넓은 땅은 미군 기지가 되어 6・25전쟁의 핵심 지휘부역할을 했다. 여하튼 용산에서 친구 덕분에 한 끼 근사한 식사를 한 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용산을 주제로 한 이와 같은 상념은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드래곤 호텔 레스토랑 전경.

이제 용산은 더 이상 ‘슬픈 이무기의 땅’이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어느 나라의 주둔이나 점령이 없는 원래의 용산으로 돌아온다. 사진은 드래곤 호텔 내 레스토랑 모습. 이 레스토랑도 이제 마지막일지 모른다. ⓒ김동철

 

이제 용산은 ‘슬픈 이무기의 땅’이 아니다. 다시 용트림이 일어나 대한민국의 국운을 융성케 하는 곳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서울 도심에 쾌적한 환경의 공원이 들어서 수많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울 뿐이다. 역사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후세들은 더욱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살아야 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이 글을 친구 L이 만약 읽는다면 그는 또 다시 제의를 해올지 모르겠다.

“야 친구들아, 미군 가기 전에 용산에서 스테이크 파티 한 번 더, 원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