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최순실 게이트와 이순신 정신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11. 17. 14:35

최순실 게이트와 이순신 정신

  • 최순실 게이트에 오락가락하는 대한민국

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이 뿌리째 흔들거리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연예계까지 그녀의 마수(魔手)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고 최태민 영생교 목사에 이은 ‘사이비 교주’ 최 씨와 그 비호세력들은 국가 안보와 경제라는 위중한 두 축마저 흔들리게 만들었다. 대통령의 권위를 이용한 호가호위(狐假虎威) 세력에 민심의 분노는 격앙돼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굿하는 무당.

 

대한민국이 최태민 영생교(영세교) 목사의 딸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으로 인해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다. ⓒufokim/Shutterstock

 

허나 벼룩을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법. 새로 국무총리로 지명된 사람은 사드배치 반대를 외치고 있고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반도의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경제 사령탑은 온데간데없고 공무원들은 넋 놓고 민생은 뒷전으로 밀렸다. 최선의 답이 없다면 차선의 답을 찾아서 가야 할 터인데, 나라는 두 쪽으로 쪼개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탓하는 진흙탕 개싸움의 이전투구(泥田鬪狗)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배신(背信)을 일삼는 배신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권력에 붙어 단물을 다 빨아먹은 뒤 이제는 혼자만 살겠다면서 ‘네 탓’ 타령들이다. 비겁하고 천박한 싸구려 천격(賤格)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의 다른 선택

원래 인간은 호리오해(好利惡害)한 이기적인 존재다. 즉 이득이 보면 찰싹 달라붙고 해가 되면 도망가는 게 사람 본능이다. 인간의 심성은 본디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의 순자(荀子, BC 298~238)는 그래서 도덕으로 절제하고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인간은 승냥이마냥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데 마구잡이로 분탕질 친다고 갈파했다.

 

국회의사당.

 

위정자의 민낯과 배신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때, 왕의 명령을 어겨가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이순신 장군의 희생정신이 생각이 난다. ⓒVincent St. Thomas/Shutterstock

 

역사적으로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1597년 1월 정유재란으로 조선 강토는 다시 일본군의 조총과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선조 임금과 조정에서는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부산포 앞바다로 진격해서 재침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반간계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찌 간첩의 세 치 혀를 믿고 수군을 함부로 출동시킨다는 것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선조는 ‘변방의 장수가 나아가 적을 치지 않았다는 죄, 종적불토(從敵不討)’ ‘군왕을 무시했다는 무군지죄(無君之罪)’, 그래서 ‘나라에 부담을 주었다는 부국지죄(負國之罪)’를 적용해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시켰다. 그리고 참수형(斬首刑)으로 다스리려 했다. 2월 13일 이순신 장군은 계급장을 모두 떼인 채 한산도 진영에서 한성으로 끌려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 틈을 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원균은 전투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선조의 명을 받잡아 부산포로 출동했다가 그만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거제도 부근 칠천량 해전(7월 16일)에서 조선 수군을 거의 모두 바닷물 속에 수장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힘겹게 마련한 판옥선과 수군 등을 모두 잃고 자신도 추원포에 상륙했다가 왜군에게 목이 달아나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이순신 장군이 그동안 차근차근 준비해둔 모든 전력을 한꺼번에 다 말아먹은 셈이다. 조선의 남해안 제해권은 더 이상 보장받을 수 없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역시 위급한 상황이었다. 나아가 왜수군이 서해로 진출해서 금강, 한강, 임진강, 대동강, 압록강으로 진격한다면 조선반도는 다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참극을 맞이해야 할 비상상황이었다.

선조는 부랴부랴 이순신을 다시 찾았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에게는 군선도 군량도 군기도 군사도 하나 없었다. 빈털터리 수군대장, 그야말로 적빈(赤貧)의 상황이었다.

 

위기를 이긴, 필사즉생 정신

9월 16일 왜수군의 대규모 선단은 조선수군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진도와 해남쪽으로 향했다. 바로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의 시작이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밖에 없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조선수군의 세가 약하니 수군을 폐지하고 도원수 권율의 육군을 도와 육전에서 싸우라고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 상,

 

혼란스러운 이 때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 모두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필요하다. ⓒT.Dallas/Shutterstock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죽기로 싸우면 오히려 이길 수 있습니다(出死力拒戰 則 猶可爲也)’라고 해 가까스로 수군폐지를 면했다. 하지만 13척 전선에 1000여 명의 수군으로 200여 척, 1만 4000여 명의 왜수군을 어떻게 당해낸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길 승산이 없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좁은 수로(폭 294m 내외)와 급류(11노트, 시속 20km)를 이용한 곳으로 적을 유인하는 주도권을 발휘했다. 왜군 선발대 133척의 세키부네를 맞아 1000m쯤 접근한 지점에서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의 대장군전과 조란탄을 일제히 발사했다. 사수들은 불화살을 벼락처럼 쏘아댔다. 이에 왜군 선발대 31척을 분멸(焚滅)시키고 깨어진 세키부네는 부지기수였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단 한 척도 상하지 않았다.

토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쿠루시마 미치후사, 마다시, 모리 다카마사 등 굵직한 왜장들이 참전했지만 쿠루시마 미치후사, 마다시 등은 전사하고 토도 다카도라는 중상을 입었다. 왜수군은 8000여 명의 사상(死傷) 자를 낸 뒤 물러갔다. 해전이 벌어지기 전날 이순신 장군은 왜수군의 내습에 떨고 있는 휘하 장수와 군졸들에게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를 강조했다. ‘필히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필히 살고자 죽을 것이다’ 해전 당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좁은 수로에 일자진(一字陳)을 치고 맨 앞장을 섰다.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나머지 장수들의 전선은 2마장(약 800m) 후방에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다가 나중에 합류했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하늘이 도와준 천행(天幸)’이라고 했다. 그러나 천험의 지리와 천혜의 조건을 유리하게 바꾸어 천행을 이룬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전략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나라사랑에 몸 바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이순신 장군 사자후(獅子吼)가 몹시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