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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조락(凋落)의 계절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11. 17. 14:42

가을, 조락(凋落)의 계절

떨어지는 낙엽처럼 추락한 국격

올해도 어김없이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풍류객들은 잠시 일손을 놓고 전국 방방곡곡 단풍놀이에 열을 올린다. 허나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명산 단풍놀이도 즐거움만으로 충만할 것 같지는 않다. 오랜만에 국회도서관에 들렀는데 그 울울창창하던 가을나무들도 세월의 변화를 비켜나지 못하고 단풍 물결에 휩싸였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보고 있자니 강남의 한 아줌마로 인해 낙엽처럼 떨어진 우리나라의 국격이 연상돼 마냥 즐겁지 않다. ⓒGooDween123/Shutterstock

 

햇볕을 받은 샛노란 은행잎과 붉디붉은 단풍은 찬연하지만 땅에 떨어진 낙엽들은 찬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녀 안쓰러웠다. 작금의 나라꼴이 그래서인지 마음이 더욱 스산하다. 다만 언제나 푸른 상록수! 소나무와 침엽수들은 독야청청(獨也靑靑) 그 푸름의 자태를 의연하게 뽐내고 있다. 아! 비로소 여기서나마 희미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세월은 이렇게 나뭇잎에 투사돼 흘러만 간다.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 세계는 어떤가. 최순실 표 불의(不義) 앞에서 나라는 콩가루가 됐고 만신창이가 됐다. 국민들은 허탈한 나머지 추위를 무릅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땅에 떨어진 국격은 지구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완전히 벗겨진 대한민국의 민낯이 시시각각 전세계에 중계방송되고 있다. 해방 이후 70년만에 기적같이 이룩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영광은 빛바랜 지 오래다.

거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 옛날 영화를 누리다 몰락한 아르헨티나, 필리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절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강남 아줌마와 그 일당으로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절체절명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을 속이고 최고 권력과 야합한 최순실과 그 일당의 불의(不義) 앞에 ‘네 탓’ 타령만 무성하다. 관련자들은 제 한 목숨 챙기기 위해서 남 탓을 하는 사이 야당 정치인들은 대권을 이미 손에 쥔 듯 안하무인, 헌정마저 어지럽히고 있다.

 

늑대 싸움.

 

현재 우리나라는 배신과 음모, 이로움을 좇으며 짐승의, 짐승에 의한, 짐승을 위한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David Dirga/Shutterstock

 

오늘날 위기 앞에서 표류하는 대한민국호(號)를 구원할 구원 투수는 없고 제 살길 찾기에 급급하다. 하기야 인간은 본디 이익을 좇고 해로움을 피하는 호리오해(好利惡害)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들려는 탐욕은 짐승 세계의 약육강식(弱肉强食) 정글의 법칙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고 속으로 배반을 꿈꾸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야생의 들짐승, 날짐승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현재 대한민국은 짐승의, 짐승에 의한, 짐승을 위한 야수들의 혼돈을 심하게 경험하는 중이다.

 

떨어진 낙엽은 땅으로 돌아가 다시 꿈꾼다

만추(晩秋)의 푸르른 하늘을 쳐다본다. 문득 눈앞에 독야청청 서있는 소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있다. 믿음직하다. ‘너뿐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바라본다. 그 옛날 중고교시절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에서 느꼈던 낭만적 영감(靈感)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작가 이효석은 ‘낙엽 타는 냄새에서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와 잘 익은 개암 냄새를 교차시키고 낙엽을 꿈의 껍질로, 나아가 낙엽의 재를 죽어버린 꿈의 시체로 전유하는 감수성이 있었다’ 또 ‘낙엽 타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는 서술조차 이제는 다 잊혔다. 왜 그럴까? 눈앞에 펼쳐진 오늘날 현실이 하도 참담해서 가슴이 먹먹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향기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낙엽의 소중한 역할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지난 봄 저마다 꿈을 안고 위로, 앞으로 약진하던 저 이파리들은 차가운 북서 삭풍(朔風)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버렸다. 자신의 역할을 마친 낙엽은 땅으로 돌아와 다시 긴긴 동토의 겨울을 지낸 뒤 또다시 새로운 꿈을 꿀 것이다. 떨어진 낙엽은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선순환, 우주의 질서법이다. 천덕꾸러기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도 한때 자신의 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뿌리에 헌납함으로써 다음세대 새 생명의 위대한 꿈을 잉태하기 위한 희생으로 승화한다.

 

단단히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처럼

독야청청 소나무는 우리가 오랫동안 겪었던 참담했던 역사적 사실을 세월의 두께만큼 알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바뀌고 인심이 변해도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은 소나무의 의리일 뿐이다.

 

소나무.

 

세월이 바뀌고 인심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독야청청한 소나무의 의리뿐이다. 분탕칠한 이들은 바람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StephanScherhag/Shutterstock

 

예로부터 소나무는 지조 높은 선비의 절개에 비유됐다.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단종의 복위를 위해 애쓰다 압구정(鴨鷗亭) 한명회(韓明澮) 등에게 무참하게 처형당했다.

성삼문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비록 몸은 죽어 없어질 테지만 그래도 남은 여한 있어, 큰 가지 뻗힌 소나무 되어 하얀 눈이 온천지를 뒤덮을 때 비로소 홀로 푸르른 소나무의 자태를 보여주리라’는 마지막 유언이다.

왕위를 도둑질한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끝까지 그 부당함을 지적하다 목숨을 잃고 마는 선비의 날선 기개가 만고불변의 소나무가 되었다.

단종의 복위세력을 무참하게 짓밟은 세도가 한명회의 호는 압구정(鴨鷗亭)이다. 칠삭둥이로 태어났지만 그 수완이 뛰어나 두 딸을 왕비로 들였고, 자신은 영의정으로 국정을 떡 주무르듯 했다. 퇴임 후 한강변에 그의 호를 따서 압구정이란 정자를 짓고 살았다. 한때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한명회는 연산군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 그 잘린 목이 광화문 사거리에 내걸렸다.

이 대목에서 나라를 진흙탕에 빠뜨려놓은 강남 아줌마 최순실과 그 비호세력들이 모두 한명회가 살았던 압구정 부근에서 역적모의(逆賊謀議)를 했다는 사실이 바람에 스쳐갔다.

압구정동 한명회 악령(惡靈)이 최순실 세력에게 전이돼 나라를 분탕질 친 ‘운명의 장난’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분노와 화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 백성들에게 소나무 피톤치드향이 널리 퍼져 진정효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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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