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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탐방, 비운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德惠翁主)

비운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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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결혼봉축비. 나가사키 현 쓰시마(對馬島) 하단 이즈하라항(厳原港) 시내 가네이시조(金石城) 정원에는 조선 황제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와 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 백작의 결혼기념비가 오롯이 솟아있다. ⓒ김동철

 

나가사키 현 쓰시마(對馬島) 하단 이즈하라항(厳原港) 시내 가네이시조(金石城) 정원에는 조선 황제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와 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 백작의 결혼기념비가 오롯이 솟아있다. 시미즈야마(淸水山) 아래 자리한 가네이시조(金石城)는 대마도 번주(藩主)가 대대로 기거하던 종가(宗家), 즉 소 씨의 본가이자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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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마도주가 거처했던 금석성(가네이시조). 성의 입구는 외문으로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문으로 꼽힌다. ⓒ김동철

 

1931년 10월 덕혜옹주 부부가 쓰시마를 방문했을 때 이곳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팔번궁 신사 경내에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를 건립했다. 그런데 1955년 두 사람이 이혼하자 주민들이 이 비를 쓰러뜨린 후 방치하다가 2001년 부산-쓰시마 직항선박인 씨플라워호가 취항하면서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지금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는 단골 명소가 되었다. 일단의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한 남자 가이드가 설명 도중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어떻게 조선 황실의 옹주를 일본의 일개 도주의 백작과 결혼시킬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맞는 이야기였다. ‘허나 그게 어디 조선의 황족뿐이었으랴, 식민지 백성들은 일제의 종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역사는 차갑고 무섭고 슬프다.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덕혜는 망국(亡國)의 조선을 상징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 이름은 산산이 부셔져 한국과 일본 사이 현해탄(玄海灘)에서 맴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조선의 제26대 왕(황제)인 고종의 고명딸이다. 정비인 명성황후의 소생이 아니어서 옹주라고 부른다. 옹주였지만 고종이 회갑을 맞은 해에 태어났으므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듬뿍 받았다.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생존한 자는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덕혜옹주의 어머니 귀인 양씨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었는데 1912년 5월 서른이 넘은 그녀가 덕수궁 명선당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딸을 순산했다. 고종은 몹시 기뻐하면서 양씨를 귀인(貴人)에 봉하고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 어린 덕혜는 고종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로 총애를 듬뿍 받았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 궁내부에서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皇籍)에 올랐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빼앗기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919년 고종은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일본에 의해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다.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昇遐)했다.

 

이국 땅, 일본에서 유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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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일출심상소학교 시절. 1925년 3월 ‘황족(皇族)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총독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동철

 

어린 덕혜는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공포에 휩싸였다. 1925년 3월 ‘황족(皇族)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총독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고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했다. 그녀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이방자 여사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 국왕 메이지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친왕의 딸로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정략적 결혼을 하고 황태자비가 된 여인이었다. 영친왕은 어린 나이에 동병상련의 신세가 된 막내 동생 덕혜옹주를 성심껏 돌봐주었다. 그해 4월부터 옹주는 일왕가와 화족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에 편입했다.

1929년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자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服喪 상중에 상복을 입음)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930년 봄부터 몽유증(夢遊症 꿈꾸듯 밤에 돌아다니는 것)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오빠인 영친왕(英親王) 이은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이었다. 일종의 정신분열증이었다.

 

대마도도주 후예,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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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와 결혼식 사진. 하단 우측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에서 소 다케유키의 사진을 지우고 보도한 것이다. ⓒ김동철

 

스무 살이 되던 1931년 5월 대마도(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소 다케유키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의 청년으로 쓰시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쓰시마도지에 시를 기고했으며 유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1932년 딸 정혜(正惠 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남편과 주변 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결국 1955년 소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을 했다. 그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23살의 정혜(마사)는 1955년 가을, 대학 동창 스즈키(鈴木)와 결혼했다. 그해 들어 덕혜옹주와 이혼하고 사랑하는 딸까지 곁을 떠나자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힌 소 다케유키는 가을에 서둘러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인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1956년 8월 정혜가 돌연 실종되었다. 그달 26일 정혜는 ‘코마가다케 방면에서 자살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갔다. 경찰에서 수차례 험준한 산악지역을 수색했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1942년 여름 소 다케유키는 딸 마사에와 함께 코후(甲府) 오비나산(帶名山)을 넘어 쇼우센쿄(昇仙峽)에 놀러갔다. 그때 14수의 시를 썼는데 마사에를 그린 작품이 무려 여섯 수였다. 소 다케유키는 외동딸을 지극히 사랑했다.

‘내 딸과 함께 먹는 오비나 산기슭의 산딸기에 안개가 서려 있네. 맞은편 후지산에는 햇볕이 쨍쨍.’

‘다리를 끌며 걷는 딸을 얼러가며 겨우 찾은 산장, 벌레가 무서워 곧바로 뛰쳐나와 버렸네.’

딸의 행방을 모른 채 생이별을 했고 남편과도 헤어진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의 차가운 하얀 벽에 갇혀있었다. 1956년 4월 발간된 소 다케유키의 첫 번째 시집 해향(海嚮)에 실려 있는 ‘사미시라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에 헤어진 아내에 대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덕혜옹주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어린 시절 약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金乙漢 1905~1992) 기자에 의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 중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는 영친왕을 만나고 나서야 그녀가 매월 1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 의해 귀국이 거부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 낙선재에서 삶을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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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낙선재 유언 낙서.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고 쓰여 있다. ⓒ김동철

 

1961년에는 5.16 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도쿄에 들렀다. 그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그러자 망국의 왕족을 돕는 것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전폭적인 지지에 따라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38년 간 일본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덕혜옹주는 곧바로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2월 8일 그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고 왕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했다. 1968년 가을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냈다. 어렵사리 조강지처인 옛 아내를 만나러 왔던 소 다케유키는 허탈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1985년 77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었던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조강지처인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

먼 바다 갈매기가 모여드는 섬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잊지 않을 거야.

세상이 다할 때까지.

덕혜옹주도 실어증(失語症)을 앓다가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 장의 낙서가 남아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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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