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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기행, 한일 가교의 현장

category 칼럼/대마도 역사문화탐방 2016. 12. 27. 10:37

대마도 기행, 한일 가교의 현장

  • 대마도는 일본 열도 4개의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와 한반도 사이에 길게 뻗어있어 예로부터 한반도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징검다리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200년간 조선 왕조와 일본 도쿠가와(德川)의 에도 막부 사이에 정치, 외교, 무역을 연계하는 중간 기지였다.

조선통신사길

 

조선통신사 사절단 400~500여명은 한양을 출발한 뒤 부산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낸 뒤 판옥선 서너 대를 타고 쓰시마(대마도 對馬島) 서쪽 해안 천혜의 포구인 사스나(佐須奈)항에 도착했다. 이곳 기항지에 잠시 들렀다가 쓰시마 북단의 오우라(大浦)항, 와니우라(鰐浦)를 거쳐 동쪽 해안을 타고 내려와 니시도마리, 히타카츠(比田勝), 사카 등을 거친 뒤 이즈하라(嚴原) 항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대마도주의 영접을 받고 며칠 머문 뒤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 시모노세키 항에서 혼슈인 일본 본토에 상륙해 교토, 오사카, 최종목적지인 에도(도쿄)로 향했다. 이렇듯 수로와 육로를 이용한 이들이 왕복한 거리는 4천㎞가 넘었으며 6개월∼1년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었다.

 

조선과 교역으로 먹고 살았던 쓰시마는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선언하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志)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의 선봉에 서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고통의 섬이 되었다. 섬 안에 있던 16∼55세의 모든 남자(약 6천여명)가 전쟁에 동원돼 많이 희생됐고 조선과의 교역이 끊기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극심한 기아 상태에 빠졌다. 그때 그들은 구황(救荒)작물로 고구마를 캐서 근근이 연명했다.

 

영조때인 1763년 10월 6일 조선통신사 조엄(趙曮)은 대마도 서쪽 사스나 포구에서 고구마를 처음 접하게 된다. 먹어보니 달콤하고 배가 부르자 급히 종자를 구입해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爀) 앞으로 보냈다. 조국 땅에 하루빨리 보내기 위해 빠른 연락선인 비선(飛船)에 실어 보냈다. 고구마라는 이름도 ‘코코이모(コキイマ)’란 대마도 방언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말 1363년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이 원나라에 갔다가 탐스러운 목화밭을 보고 나라 밖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와서 면화를 가꿔 의복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조엄도 고구마를 조선으로 들여와 당시 굶주리던 백성들의 허기진 배를 다소나마 채워주는 먹거리 혁명을 일으켰다.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비

 

쓰시마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항의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주변에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자료관 입구 옆에는 쓰시마가 선린의 뱃길을 연 ‘통신사의 섬’임을 알려주는 조선국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서 있다. 근처 가네이시조(金石城) 공원은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12차례나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총기획자였던 쓰시마 번주(藩主)의 궁궐과 통신사 일행을 맞은 영빈관이 있던 자리다. 영빈관은 역관과 상인들의 교역장소였다. 조선과의 무역이 곧 ‘생명줄’이었던 쓰시마는 조선에서 인삼과 생사(生絲)를 사들여 일본 본토에 팔아 40배의 이윤을 챙겼다.

 

이즈하라시 시마모토 식당 입구의 조선통신사 그림

 

이즈하라시 시마모토 식당 입구의 조선통신사 그림

 

이즈하라 시내에는 풍랑으로 표류한 조선인 어부가 머물렀던 집단수용소 표민옥적(瓢民屋跡)이 있고 부근 언덕배기를 타고 올라가면 고풍스러운 모습의 세이잔지(西山寺)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절은 조선 선조 때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묵은 이후 여러 사절단의 숙소로 이용된 곳이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일행은 대체로 그 지역의 유명한 절에서 묵었다. 세이잔지 정원 잔디밭에는 조선통신 부사 학봉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는 한일 양국 국민의 영원한 선린우호에 기여하고 김성일의 시문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산사의 학봉 김성일 시비

 

서산사의 학봉 김성일 시비

 

一堂簪蓋兩邦臣(일당잠개양방신) 한 집에 의관을 갖춘 두 나라 신하

區域雖殊義則均 (구역수수의칙균)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법도는 같도다

尊俎雍容歡意足(존조옹용환의족) 극진한 접대와 환대에 만족하니

傍人莫問主兼賓(방인막문주겸빈)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묻지 마시오

 

 

부사 김성일은 당시 세이잔지 주지인 게이테스 겐소(玄蘇 1537~1611)의 영접을 받고 체류하는 동안에 서로 시문(詩文)을 교환하고 우정을 쌓았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이 나눈 필담(筆談)은 양국 간 선린우호의 뜻을 보여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데 귀국후 선조에게 복명할 때 김성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인물평은 다음과 같았다.

 

“히데요시는 원숭이같이 볼품없고 눈은 쥐와 같아서 명나라 대륙을 치러갈 위인이 못된다.” 김성일의 이 말을 들은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평지풍파의 사달이 났다. 1592년 4월 13일부터 왜군 15만 대군이 줄줄이 부산포로 상륙했다. 임진-정유 7년 전쟁으로 나라는 쑥밭이 됐다. 한 사람의 잘못된 오판(誤判)으로 나라는 망조에 들었다.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정사 황윤길이 부산포에 내리자마자 변방 수령들에게 곧 전쟁이 날 터이니 성벽을 방비하고 군비를 챙기라는 말에 주민들이 동요를 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였다.”

 

김성일과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일본승 겐소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종군승(從軍僧)으로서 참모와 통역역할을 하면서 조선 전장을 누볐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겐소와 김성일 사이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에 파견된 조선사절단은 무로마찌(室町) 막부시대에도 있었으나 전국 분열시대로 들어서면서 중단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바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의 청원을 받아들여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간 12회에 걸쳐 파견한 외교, 무역사절단이다. 모두 5천355명이 파견되어 평균 446명이 참여했다.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시(詩), 서(書), 화(畵), 마장마술(馬場馬術) 등을 선보여 오늘날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할만하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