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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만난 애국자와 매국노

category 칼럼/대마도 역사문화탐방 2016. 12. 22. 11:04

대마도에서 만난 애국자와 매국노

  • 구한말 최고의 의병장이었던 최익현 선생, 한일 합방의 공을 세운 김학진과 조선왕조를 무너트린 이완용. 대마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빛과 어둠이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 골목길에 슈젠지(修善寺 수선사)가 있다. 이 절은 656년 백제 비구니인 법묘(法妙)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당시에는 수선암(修善庵)이었다. 법묘 스님은 유마경(維摩經)을 유마경전의 음송(音頌)을 대마도에 남겼다. 1573년 수선사(修善寺)로 개칭되었다. 신라 금동대일여래불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 수선사가 한국인에게 유명해진 것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시신이 안치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대쪽같이 꼬장꼬장한 선비요, 최고령 의병장이었던 최익현 선생의 파란만장한 말년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 쓰시마 이즈하라시다.

 

면암 최익현 초상화. 1905년 채용신 그림. 국립제주박물관

 

면암 최익현 초상화. 1905년 채용신 그림. 국립제주박물관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철종임금 때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을 거치며 내외직을 두루 섭렵했다. 그는 불의와 부정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부딪히고 깨지고 나중에는 쓰시마로 압송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인물이다.

1868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했다. 이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흑산도로 유배갔다. 1875년 일본군함 윤요호(雲揚號)의 강화도 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포격사건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최익현 선생은 “일본을 믿을 수 없으며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라며 위정척사(爲政斥邪) 운동의 맨 앞에 섰다. 그 이듬해인 1876년(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며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인데 도끼를 들고 상소한 것은 임진왜란 직전에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1895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단발령(斷髮令) 조치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는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 등을 ‘을사 5적’으로 지목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賣國奴)의 처단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 후 전북 순창에서 의병장으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그러나 대한제국군과의 대립에서는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라며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아 일본군에 체포됐다. 1906년 6월 일본군사령부는 최익현(崔益鉉) 3년, 임병찬(林炳瓚) 2년형을 선고하고 일본헌병이 호송, 대마도의 이즈하라(嚴原)에 연금시켰다. 그곳에는 이미 호서(湖西)의 의병장이던 이칙(李侙), 남경천(南敬天) 등 9명이 유배되어 있었다.

 

최근에 발견된 최익현 선생 대마도 유배도. 왼쪽은 서울 남대문 밖, 오른쪽은 부산 초량 모습.

 

최근에 발견된 최익현 선생 대마도 유배도. 왼쪽은 서울 남대문 밖, 오른쪽은 부산 초량 모습.

 

쓰시마 섬 이즈하라 위수영으로 압송돼 감금된 최익현 선생은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에 돌입했다. 또한 일본 간수가 머리를 자를 것을 요구하자,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했다. 73세 노인의 몸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던 선생은 결국 1906년 음력 11월 5일 유배지인 쓰시마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대한인 최익현 순국비

 

최익현 순국비

 

순국한 선생의 유해는 백제 비구니가 건립했다는 슈젠지(修善寺)에 며칠 동안 안치되었다가 부산항으로 이송됐다. 영구를 실은 일본 기선이 11월 부산 초량진(草梁津)에 도착하자 1,000여 명의 군중이 영구를 뒤따라 그 행렬이 5리나 이어졌다고 한다. 슈젠지에는 이러한 인연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 8월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에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를 건립했다. 최익현 선생의 위국헌신 노력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위정척사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슈젠지(修善寺 수선사)로 돌아와 보자.

 

수선(修善)이란 ‘수행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일 텐데, 편액에 이 글씨를 쓴 주인공이 김학진(金鶴鎭 1838~1917)이다. 편액의 왼쪽에 김학진인(金鶴鎭印)이라는 붉은 색 낙관(落款)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탄 후 일본으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일본을 그렇게 싫어했던 최익현 선생의 운구가 친일파 김학진이 쓴 편액 현판 아래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사실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수선. 왼쪽 아래 김학진의 붉은 낙관이 찍혀있다.

 

수선. 왼쪽 아래 김학진의 붉은 낙관이 찍혀있다.

 

그렇다면 김학진(金鶴鎭)은 누구인가?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숭명배청(崇明排淸)’, 즉 명나라를 존중하고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대쪽 선비’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11대 손이다. ‘세도가 안동 김씨의 시조’로 불리는 김상헌의 후손인 김학진은 ‘금수저’를 물고 나온 권문세가의 자제였다. 문과에 급제해 고종 때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비롯해 반일 상소를 올렸다. 이로하여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일도 있었다. 이후 최익현이 의병에 함께 나설 것을 제의했으나 동조하지 않았다. 아마 김학진은 ‘조선은 이미 지는 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한일 병탄(倂呑)’에 기여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고 2만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기도 하였다. 1917년 김학진은 사망하였고 그 작위는 아들 김덕한이 내려 받았다. 세월은 흘러 흘러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와 그의 아들은 반민족행위 106인의 오명(汚名)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마도에는 또 한명의 친일파가 있다. 조선왕조를 무너트린 ‘매국(賣國)의 대명사’로,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은 이완용(李完用)의 흔적이 고쿠분사(國分寺 국분사)에 남아있다. 이 사찰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1862~1921)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다. 고쿠분은 대마도 출신으로 어렸을 때 부산 초량의 어학소와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비서로 한국에 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탄 체결 때 통역으로 활약했다. 고쿠분은 1906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비서관, 1910년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겸 중추원 서기관장 등을 거쳐 1917년 1월에는 이왕직(李王職) 차관까지 올랐다.

 

대표 친일파 이완용의 글씨

 

대표 친일파 이완용의 글씨

 

1921년 9월7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9월 5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결혼피로연에 참석했다가 술을 마시고 토사(吐瀉)를 하다 장에 구멍이 뚫려 사망했다고 보도됐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 쓰시마로 옮겨졌다. 이완용은 그의 죽음을 애도해 비명을 써줬다. 묘비에는 ‘종삼위훈일등 국분상태랑지묘(從三位勳一等 國分象太郞之墓)’라 쓰여 있고 작은 글자로 ‘후작 이완용 서(侯爵 李完用 書)’라고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 위 세 사람의 자취는 이즈하라의 좁은 공간에서 각자의 인생관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역사적 기록은 훗날 ‘양날의 칼’이 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진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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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