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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찾은 백제, 신라, 고려의 흔적

  • 대마도 여행에서 만난 백제, 신라, 고려의 흔적은 우리 역사의 증거라는 면에서 더욱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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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의 혈연관계를 언급한 아키히토 일왕 ⓒ KBS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둔 2001년 12월 2일, 일본 아키히토 천황은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 462~523년)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간무(桓武) 천황은 781년부터 806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50대 천황이다. 그런데 68세 생일을 앞둔 아키히토 천황이 일본 황실과 백제와의 혈연적 관계에 대해 직접 언급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놀랄만한 뉴스였다. 아키히토 천황은 이어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당시 오경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됐으며,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한일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발언이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는 대척점에 섰지만 바다 건너 왜국과는 친하게 지냈다.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자 백제 왕족과 유민들은 대거 바다를 건너 일본의 규슈 지방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했고 663년 3만여명의 왜군의 지원을 받아 백천강(금강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저항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백제는 왜의 도움을 받아 함께 싸운 혈맹의 동지관계였다.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김동철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변, 바다 건너 한국이 바라보이는 산기슭 아래에 왕인(王仁) 박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왕인 박사는 5세기 초인 405년 백제 전지왕(腆支王) 2년 왜왕(倭王)의 초청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문화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에선 ‘학문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1995년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선정한 ‘일본의 역사를 만든 101인’에 왕인 박사를 앞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왕인 박사의 고향인 전남 영암에는 기념관이 있고 일본 오사카에도 왕인 박사를 기념하는 신사가 있다. 또 백제왕을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어 있다.

일본말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는 ‘시시하다,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일본말로 백제를 구다라(百濟)라고 하는데 ‘구다라나이’라는 말은 ‘백제가 없다’, 즉 백제가 만들지 않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고,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문사철의 인문학을 가져다 준 백제인들에 대한 추앙의 표시이다.

신라국사 박제상 순국비
신라국사 박제상 순국비 ⓒ김동철

또한 신라 박제상(朴堤上)의 순국비도 있다. 이 역시 와니우라 부근의 작은 포구에 홀로 서있다. 동아시아의 격동기인 5세기 초, 왜국은 신라와 국교를 맺으면서 내물왕(奈勿王 ?~402년)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내도록 했다. 그 후 이 왕자의 귀환을 요청하기 위해서 왕의 사신인 박제상을 왜에 파견했다. 미사흔과 신라의 국사인 박제상이 대마도의 사호(佐護)항구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지모와 용기를 겸비한 박제상은 왕자를 무사 귀국시켰지만 자신은 붙잡혀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일 양국은 박제상의 충절을 현창하기 위해 순국비를 건립하게 됐다. 박제상이 죽었던 장소인 목도가 대마도가 확실하고 일본서기에서 대마도의 ‘사우미(組海)’의 ‘미나토(水門: 湊)’라고 상세히 그 장소를 밝혀 이곳에 순국비가 세워졌다. 박제상의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수릿재(鵄述嶺 경주와 울산 경계선)의 높은 바위 위에서 멀리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그대로 돌부처가 되어 수릿재 신모(神母)가 되었다는 망부석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

원구(몽고군) 분전도
원구(몽고군) 분전도 ⓒ김동철

 

쓰시마는 고려, 몽골과의 쓰라린 악연(惡緣)을 가지고 있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 민족의 침공을 받은 전투가 바로 여몽(麗蒙)연합군의 내습이었기 때문. 여몽연합군은 고려와 몽고군의 연합군으로, 당시 왜국은 몽고군을 원구(元寇), 즉 원나라 도적이라고 표현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은 몽고가 자국 땅을 습격했다고 표현한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 1246~?)가 자신의 공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 그림에 나타난 고려군과 몽고군은 현저히 다르게 표현되었다. 고려군은 점선이 있는 갑옷을 입고 있으며 투구를 쓰고 양쪽 귀에 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있다. 반면 몽고군은 갑옷을 입고 목과 턱까지 오는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군은 긴 화살을 쏘며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 고려군은 최전방에서 일본군에게 활을 쏘며 용맹함을 뽐내고 있으며, 몽고군과 달리 고려군의 얼굴을 도깨비와 유사하게 표현한 것도 당시 일본군이 고려군을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표현일 것이다.

여몽연합군과 왜군의 전투도
여몽연합군과 왜군의 전투도 ⓒ김동철

 

고려에서 건조한 전함에는 몽골군 2만5천명, 고려군 8천명, 사공 6천7백명 등 도합 3만9천700명이 승선했다. 제1차 원정군은 원종 15년(1274년) 음력 10월 3일에 합포(마산)를 출항해 쓰시마를 공략하고 이키시마를 거쳐 기타큐슈의 하카타만(博多灣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승전을 거듭했으나 한밤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와 많은 전선과 병사를 잃고 귀환했다. 제1차 원정에서 30~40%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원(元)은 세조 16년(1279년) 남송(南宋)에 병선 600척을 만들게 하고, 고려(원종 5년)에도 전함 900척을 준비하게 해 제2차 원정을 명령했다.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여몽연합군은 이때도 태풍을 만난 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했다. 제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군 2만6천989명 중 1만9천397명이 생환했으나 몽골과 남송에서 참전한 원의 군사는 극소수만이 돌아왔다.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준 태풍을 일본에서는 카미카제(神風)라고 부른다. 일본은 이후 신의 가호를 받은 국가, 즉 신국(神國)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와이 진주만 공습 때도 카미카제 특공대를 동원해 미군 함정을 연달아 격파하다가 그만 핵 펀치 두 방을 맞자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나섰다. 오늘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는 모양새를 보면서 외교안보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임진왜란, 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했던 우리의 초라한 현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라의 안위(安危)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을 키워야한다는 사실도 새삼 또렷이 각인된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