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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그리워 하는 마음, 대마도 여행

category 칼럼/대마도 역사문화탐방 2016. 12. 12. 12:21

조국을 그리워 하는 마음, 대마도 여행

  •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쓰시마(대마도)는 가까운 거리만큼 옛 조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쓰시마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조선 역관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이었던 여행기.

와니우라 해변

 

쓰시마(對馬島) 최북단 와니우라(鰐浦) 해안 언덕배기에 조선역관순난비(朝鮮譯官殉難碑)가 조국땅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있다. 이 비석 뒷면에는 112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와니우라(鰐浦), ‘악어 포구’라는 뜻으로 미뤄볼 때 암초와 파도가 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숙종 29년인 1703년 2월 5일 조선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이곳 쓰시마로 건너오던 조선 역관(譯官) 108명이 와니우라 포구 턱밑까지 왔을 때 갑작스레 불어닥친 일진광풍에 배가 뒤집혀 모두 익사했다. 조선역관단을 안내하기 위해 예인선을 타고 나온 쓰시마 번사(藩士) 4명도 역시 높은 파도에 휩쓸려 모두 숨졌다. 그래서 이곳 조선역관순난비에는 도합 112명의 희생자 이름이 올라있다.

 

조선역관순난비

 

바로 옆 한국전망대에는 종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을 본뜬 한국식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이곳에서 49.5km 떨어진 부산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고 한다. 특히 광안대교 등 부산의 밤풍경은 또렷하고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불꽃축제라도 있는 날이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스마트폰까지 터져 한국과 통화가 가능했는데 얼마 전부터 코앞에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 레이더기지에서 방해전파를 발사해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조선역관순난 희생자

 

조선역관순난비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원혼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하여 서럽고 안타깝다.

조선역관단은 대마도 3대 번주(藩主)인 종의진(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5대 번주 종의방(宗義方)의 습봉(襲封)을 축하하기 위한 국가사절이었다. 역관사 일행은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량을 비롯하여 상관 28명, 중관 54명, 하관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명단이 확인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대마도 종가문고(宗家文庫)에서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는 순국 400년을 맞이한 2003년 3월 7일 희생자들의 이름을 적은 추모비를 1991년에 세운 순난지비(殉難之碑) 앞에 추가로 건립했다. 단 한 사람의 원혼이라도 달래주려는 듯 3층 기단은 모두 112개의 돌로 쌓아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역관은 도쿠가와의 에도(江戶 도쿄)막부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와는 성격이 좀 다른 외교사절이다. 이들 조선역관은 에도까지 가는 조선통신사가 아니고 쓰시마를 최종목적지로 하는 외교사절단이었다. 당시 일본 에도 막부에서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데 따른 막대한 경비 등의 문제로 조선외교의 상당부분을 대마도 번주에게 일임했다. 조선후기에만 쉰 한 차례나 쓰시마 방문이 있었다 하니 두 나라 사이에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일본 국학의 발달과 조선인을 낮춰보는 풍조가 심해 양국 간 교류는 사라지고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에는 본격적인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조선역관은 양국 간의 정치, 외교, 무역의 사안에 대해서 협상하고 해결하는 국가파견 사절로서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쓰시마의 중심지인 이즈하라항이었다. 쓰시마 거주민들은 농사지을 땅이 절대 부족한 탓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13~16세기에 특히 중국과 조선의 연안 및 내륙까지 침범해 약탈을 일삼는 등 해적활동을 했지만 양국 간 통신사와 역관이 드나들면서 상호 평화체제를 유지해 왔다.

 

원통사 (2)

 

조선외교관들의 순난(殉難) 현장에서 저 멀리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조선통신사, 역관들이 지금과 같은 동력선이 아닌, 격군들이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를 타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새삼 노꾼들의 고생이 엄청났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조선통신사로 조선의 외교를 빛낸 충숙공 이예(忠肅公 李藝 1373∼1445)가 떠올랐다. 마침 이예 선생 공적비는 쓰시마 엔쓰지(圓通寺)에 남아있다. 엔쓰지는 대마도 번주인 종씨(宗氏) 7대 사다시게가 지은 저택으로 10대 사다쿠니가 이즈하라(嚴原)로 저택을 옮길 때까지 60년 동안 통치관청으로 쓴 곳이다. 이 원통사에는 고려 불상 본존불과 고려 범종 등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일본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우리나라 보물들은 왜구들의 노략질에 의해서 빼앗긴 것이 대부분으로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저 잘 보관이나 해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하는 수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예는 조선 초기에 활동한 외교관이므로 조선역관들보다 300년 이전의 사람이다. 외교부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해 고려 성종 때 쳐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킨 외교가 서희(徐熙 942∼998)와 비견되는 인물로 꼽았던 주인공이다.

 

이예+선생비+해설

 

충숙공 이예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1419년) 이후 교린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보냈던 최초의 통신사였다. 어릴 적에 모친이 왜구의 포로로 끌려간 뒤 불우한 시절을 보낸 이예는 경상도 울산의 향리로 활동했다. 1396년(태조 5년) 울산군수 이은 등 관리들이 왜구에게 인질로 잡혀가자 왜구의 배를 쫓아가 군수와 함께 탈출 계획을 짜기도 했다. 때마침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내 왜구들과 화해하자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때의 노력을 인정받아 아전 신분을 벗어나 본격적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예는 25세부터 71세까지 총 40여 회에 걸쳐 일본 사신 행차에서 조선인 포로 667명을 송환시켰다. 1400년에는 대마도 부근의 이키섬(壹岐島)을 방문해 왜구의 침범을 막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아무도 가본 적 없던 머나먼 오키나와까지 가서 포로를 데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 공로로 종5품 좌군 부사직에서 승승장구, 현재의 차관보에 해당하는 종2품 동지중추원사까지 승진했다.

 

일본 도쿄의 아카시 출판사가 무로마치 시대(15세기 무렵)에 일본을 오갔던 조선통신사 이예에 관한 책을 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예를 발굴한 사람은 일본 신문기자 시마무라씨다. 그는 조선통신사에 대해 많은 책을 썼던 전문가로 ‘현해탄을 건넌 조선통신사 이예’라는 책을 통해 송희경(宋希璟 1376~1446), 신숙주(申叔舟 1417~1475)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던 외교관 이예의 활약상을 밝혔다. 조선 초기의 문신 송희경은 1420년(세종 2) 윤정월부터 10월까지 회례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쓴 사행일록인 일본행록을 남겼다. 또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1443년 그가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지어 세종에게 올린 것으로, 1471년(성종 2)에 간행되었다. ‘해동의 여러 나라’는 일본 본토와 규슈, 쓰시마(대마도), 이키도(壹岐島), 류큐국(琉球國)이다. 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인 그 책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숙주는 명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실화(失和 분쟁유발)하지 마시옵소서.” 이웃인 일본과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인데 그로부터 채 30년도 안 된 1592년 미증유의 임진왜란, ‘피의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세상만사, 사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