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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탐방, 잃어버린 조선의 왕손 ‘이연왕희(李昖王姬)’

  • 삼나무로 뒤덮은 섬 ‘대마도’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대마도(對馬島)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대마도는 일본지명으로 쓰시마다. 두 마리의 말이 마주 보고 있는 모양으로 대마(對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산 영도 태종대에서 48.5km,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는 138km 떨어져 있어 우리나라에 훨씬 가까운 섬이다. 부산항 터미널에서 크루즈로 1시간이면 대마도 히타카츠(比田勝)항에 도착하고 계속 1시간 정도 더 내려가면 이즈하라(嚴原)항이 나온다. 거리상으로 보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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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왕희의 묘비가 있는 대마도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묘비는 옹주의 유언에 따라 조선 땅 거제도가 바라보는 곳에 세워져 있다. ⓒ김동철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반으로 배를 깔고 누운 새우 모양의 섬이다. 섬의 90%가 산지로 삼나무로 뒤덮여 있다. 일본 원산의 상록수로 일본어로는 杉(スギ sugi)다.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 보면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라는 신이 나오는데,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가 되었으며, 가슴의 털을 뽑아 흩으니 편백이 되었다. 이에 ‘삼나무는 배를 만드는 데 쓰고 편백은 서궁(瑞宮)을 짓는 재료로 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늘로 곧게 쭉쭉 뻗은 키가 40m에 달하고 지름은 두세 아름 정도의 거목이다. 편백나무와 함께 피톤치드를 내뿜어 일본인들에게는 신이 내린 축복의 나무다. 이곳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 인구 1억 3천여만 명이 4년 동안 벌어들이는 수익과 맞먹는다고 하니 입이 딱 벌어진다. 일본인들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심은 삼나무 숲을 보면서 그들의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慧眼)에 놀라움 또한 금지 못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왜수군의 아타게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關船) 등 군선은 이 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조선의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에 부딪히면 여지없이 깨지는 등 재질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삼나무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일으켜 일본인들의 고통거리이기도 하다. 경제림 삼나무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

대마도 인구는 4만6천여 명으로 어업과 임업에 종사한다. 농토가 비좁아 예로부터 조선 남서해안과 중국 해안으로 진출, 약탈과 노략을 일삼는 해적질로 먹고 살았다. 대마도는 생존을 위해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덴쇼 16년(1588년) 봄에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몸소 교토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자신이 조선에 건너가 교섭하겠다고 밝힌 뒤, 6월에 하카타 세이후쿠지의 승려 게이테쓰 겐소를 정사, 요시토시 자신이 부사가 되어 하카타의 상인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가 한양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선의 국왕 선조를 알현하고 교섭한 끝에 1589년 조선 측의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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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7년 조선은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찾아오기 위해서 쇄환 겸 회답사를 일본에 보내 1400여명의 포로를 찾아왔지만 정작 선조 자신의 딸인 옹주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김동철

 

소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이었던 정명향도(征明嚮道 명을 치고자 하니 앞장을 서라)를 가도입명(假途入明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조선에 전했고 이마저도 실현되지 않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 중간에 있는 대마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뻔했기 때문에 소요시토시는 어떡해서든지 전쟁을 막으려 애를 썼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공이 선언되자 대마도주인 소요시토시는 그의 장인인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예하 장수로 조선 침략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상인출신답게 임진왜란 7년 내내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이끌었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깝다 보니 자연히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여기저기 남아있다.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한 백제의 왕인 박사 현창비, 신라 박제상 순국비,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상륙지, 조선통신사 기념비, 조선역관사 수난비, 선조 옹주 묘비, 학봉 김성일 비,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 의병장 최익현 순국비 등 유적지가 있다.

 

대마도에 포로로 잡혀간 선조의 옹주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선조 옹주 묘비를 소개한다. 일본 대마도 여연(女連), 우나쓰라 마을에는 ‘이연왕희(李昖王姬)’라는 묘비가 있다. 묘비가 세워진 연도는 일본 연호로 경장(慶長) 18년, 갑인변(甲寅年)이니 1613년을 뜻한다. 정영호 단국대 명예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연(李昖)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의 본명이고, 왕희(王姬)란 일본어로 공주 또는 옹주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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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 여연(女連), 우나쓰라 마을에는 ‘이연왕희(李昖王姬)’라는 묘비가 있다. 이연(李昖)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의 본명이고, 왕희(王姬)란 일본어로 공주 또는 옹주를 가리킨다. ⓒ김동철

 

여연(女連 우나쓰라)이란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옹주를 비롯한 조선 여인들이 끌려온 곳이라는 뜻이다. 2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6세의 옹주를 데려와 부하 장수인 도가와에게 양녀로 입양시키고 나중에 성인이 된 옹주는 도가와의 측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옹주는 황천길을 떠나기 전 고국이 보이는 곳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7년 조선은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찾아오기 위해서 쇄환 겸 회답사를 일본에 보내 1400여명의 포로를 찾아왔지만 정작 선조 자신의 딸인 옹주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 옹주도 여느 여인과 함께 잡혀와 자신이 태어난 땅을 한평생 그리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새삼 ‘국력이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묘비는 옹주의 유언에 따라 조선 땅 거제도가 바라보는 곳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묘비 주변은 멧돼지와 사슴이 번창해서 나무뿌리를 모조리 파헤쳐놔 거의 민둥산 모양이 됐다. 대개 일본에 있는 기념지가 잘 다듬어진 것에 비하면 황량하게 버려진 느낌이 들어 민망했다.

그렇다면 그 옹주는 과연 누구일까? 선조의 재위기간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7개월이고 부인은 8명에 자녀는 14남 11녀를 두었다. 첫째부인 의인왕후 박 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며 둘째부인 인목왕후 김 씨와의 사이에는 영창대군과 정명공주가 있다. 셋째부인 공빈 김 씨와 사이에서 임해군과 제 15대 왕이었던 광해군을 얻었으며 넷째 부인 인빈 김 씨로부터 4남 5녀를 얻는데 의안군, 신성군, 원종(정원군), 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미옹주가 그들이다. 다섯째 부인 순빈 김 씨와의 사이에서는 순화군을 얻었고 여섯째부인 정빈 민 씨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가 있다. 일곱 번째 부인 정빈 홍 씨에게 1남1녀 경창군과 정정옹주를 낳고 마지막 여덟 번째 부인 온빈 한 씨에게 흥안군, 경평군, 영성군, 정화옹주를 얻었다. 선조가 낳은 11명의 여식 가운데 정명공주를 뺀 나머지 10명의 옹주 가운데 어느 한 명일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편범불반(片帆不返)’ 정신

역사가 그러하듯 힘의 균형이 불안정하면 반드시 동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단순히 근본도 없는 왜구(倭寇)라고 몰아붙였다가 서양제 화승총인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상륙 후 20일 만에 한성에 무혈입성 했다.

바깥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자초한 난리였다. 그리고 그 난리는 왕(선조)의 피난은 물론, 전 국토를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룬다)의 대참극으로 몰아넣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 안위(安危) 무시하고 집안싸움에 골몰하다가는 이런 꼴을 면키 어렵다. 자기 잘 났다고 찧고 까불다가 나라 망쳐먹는 것은 순식간이다. ‘편범불반(片帆不返)! ‘단 한 척의 왜군 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이 몹시도 그리운 때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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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