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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와 나카라이 토슈이

대마도에는 우리 조상이 남긴 우리의 흔적뿐 아니라 현지인이 남긴 우리의 흔적도 있다. 대표적 친한파였던 아메노모리 호슈와 나카라이 토슈이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년)는 한일 교류에 상징적인 인물이다. 일본 오미(近江) 고호쿠(湖北), 현재의 사가현 타가츠기죠(高月町)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가업을 잇기 위해 교토(京都)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유학자(儒學者)의 길로 들어섰다. 호슈의 자는 백양(伯陽)인데 통칭 ‘도고로(東五郞)’로 불렸다. 그는 26세 때 관리로 대마도에 첫발을 디딘 후 88세로 사망할 때까지 대마도에서 외교관이자 대유학자로 살았다. 17, 18세 무렵에 호슈는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당시 에도(도쿄)에 있던 대유학자인 키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생이 되었다.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

 

1689년 준안의 추천으로 쓰시마번(對馬藩)에 임관(任官)하였는데, 당시 쓰시마번은 막부(幕府)로부터 대(對)조선 외교업무를 전적으로 위임받아 수행하였던 조선과의 유일한 통교 창구였다. 당시 그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조선무역의 독점권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조선과의 외교를 위해서는 수준 높은 한문 실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에 쓰시마번은 이러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힘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호슈는 두 번이나 나가사키(長崎)로 유학해 중국어에 정통하게 되었다. 1698년(숙종 24) 조선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어지배(朝鮮御支配)에 임명되었고, 1703년부터 3년 동안 부산 왜관으로 유학을 왔다. 그 결과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등 3개국 말을 동시에 구사하는 유일한 인물로 명성을 날렸고, 또한 메이지(明治) 초까지 사용된 조선어 교과서 ‘교린수지(交隣須知)’(1703년경)를 펴냈다. 그는 “말을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배우는 일이며, 한 민족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일이다.”라면서, 특히 언어 습득을 강조하였다. 또 1728년에는 조선과의 외교에서 체험한 바를 설명한 ‘교린제성(交隣提醒)’을 저술하여 쓰시마 성주에게 바쳤다. 책 속에서 그는 조선에는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 습관과 취미, 기호가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일본 문화를 기준으로 사고한다면 편견과 독단이 생기고, 오해를 초래함으로써 결코 좋을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1727년 쓰시마 이즈하라에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설립해 조선과 유학을 숭배했다. 그 전통을 받아 쓰시마에 일본 최초로 한글교습소가 세워지게 됐다. 그는 쓰시마에서의 관직에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도 조선어학교를 지어 많은 조선어 역관을 양성했다.

 

호슈가 강조한 성신지교린비

 

호슈가 강조한 성신지교린비

 

호슈는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직접 습득함으로서, 완전히 일본화되어 있던 훈독 한문이 아니라 원어를 배워서 소통했기 때문에 필담이 아니라 직접 조선인, 중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외국어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 현 외무부 차관급)으로 부산으로 건너와 차왜(差倭)로 활동할 때는 조선어를 학습했을뿐 아니라 당시 양반들은 천시하던 언문(한글)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가면서 익혔다. 그는 당시 조선의 일본어 학습교재인 ‘왜어유해(倭語類解)’의 개정 증보 등의 편찬에 원어민으로서 협력했다.

 

안타깝게도 호슈는 일본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궁중 만찬 연설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의 외교철학인 ‘성신교린(誠信交隣)’처럼 한국과 일본은 신의와 성실로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다.

 

1720년 조선통신사행단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 1681~1752년)은 ‘해유록(海游錄)’에서 아메노모리 호슈와에 대한 인물평을 서술하고 있다.

 

“조선, 중국, 일본 등 3국의 음에 통하고 백가의 글을 분별하고 시문을 말할 줄 알아 일본에서는 제일이라 들었다.”

 

아메노모리 가문은 오우미 겐지의 맥을 잇는 교고쿠 가문의 가신으로, 아메노모리 지역을 획득하여 성으로 삼았다. 전국 시대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의 세력 하에 들어갔으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공격으로 아자이 가문과 함께 멸망하였다. 호슈는 제술관 신유한과의 대화에서 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시훼(豺虺 승냥이와 살무사)’와 같은 잔인한 자로 묘사하며, “히데요시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인도 도륙을 하였기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을 의식한 외교적 수사로도 보이지만, 또한 자기 가문의 쓰라린 역사가 포함된 것으로, 호슈가 히데요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의 일단으로 엿볼 수 있다.

 

호슈와 이별하는 날 신유한이 복건(幅巾)을 선물하자, 호슈는 “소중히 간직하여 뒷날 얼굴을 대하듯 하겠다.”고 답했다. 신유한이 “오늘밤 정이 있어 나를 전송하는데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길이 없구나.”라는 시를 읊자 호슈는 “나는 지금 늙었다. 다시 세상일에 참여할 수 없고, 곧 섬 귀신이 될 것이다. 본국에 돌아가 등용되어 영화로운 이름을 떨치시오.”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웃나라와 교제함에 있어 성심을 다하여 서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호슈의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현창비’ 역시 이즈하라 마치 향토자료관 근처에 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36년 간 식민지배, 독도문제와 교과서 및 위안부문제 등 한일 간의 구원(舊怨)과 갈등요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으로서 서로 잘 지내야할 이유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기념관의 나카라이 토슈이(왼쪽)와 히쿠치 이치요(오른쪽)

 

기념관의 나카라이 토슈이(왼쪽)와 히쿠치 이치요(오른쪽)

 

쓰시마에 또 한 사람의 친한파(親韓派)가 있었다. 신문기자이자 소설가였던 나카라이 토슈이(半井桃水 1860~1926년)라는 인물이다. 그의 기념관은 이즈하라 시내 사무라이 거리에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 출생인 토슈이는 부산 초량왜관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한국어를 익힌 그는 귀국한 후 도쿄 영문학 학원인 공립학사에서 공부했다. 그 즈음 1882년(고종 19)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처음으로 보도를 한 인연으로 1884년 도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을 존경하던 토슈이는 1882년 ‘춘향전(春香傳)’을 일본 최초로 번역하여 소개한 문인이었다. ‘춘향전’은 ‘계림야화 춘향(鷄林野花 春香)’이라는 제목으로 20회에 걸쳐 아사시 신문에 연재됐다. 기자이면서 소설가로 활동하던 때인 1891년 글쓰기를 배우러 온 한 스무살 여자가 있었다. 히구찌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녀는 글쓰기로 생계유지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토슈이를 자신의 스승이자, 연인으로 생각했던 이치요는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가 남긴 작품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이 있다. 2004년 일본 5000엔 지폐의 모델로 등장해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한편 나카라이는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유려한 필체로 독자를 매료시켰고 1926년 11월21일 향년 67세로 타계했다.

 

이즈하라시 옛 한국어학교

 

이즈하라시 옛 한국어학교

 

 

5천엔 권에 실린 히쿠치 이치요

 

5천엔 권에 실린 히쿠치 이치요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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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