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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탐방] 조선 침탈의 전초기지

category 칼럼/대마도 역사문화탐방 2017. 1. 7. 13:16

[대마도 탐방] 조선 침탈의 전초기지

  • 1870년대 전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은 말 그대로 조선을 침탈하자는 일본의 야욕의 근간이 되는 공략론이다. 정한론의 전초기지였던 대마도를 돌아보며 현재 우리나라의 안보와 안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만제키바시(만관교)에서의 필자 ⓒ 김동철

 

만제키바시(만관교)에서의 필자 ⓒ 김동철

 

부산에서 채 50km가 안 되는 곳, 쓰시마(對馬島) 아소(阿蘇)만에는 만제키바시(万関橋 만관교)라는 붉은 아치형 철다리가 바다 위에 걸쳐있다. 만제키바시란 1901년 일본 해군이 아소만과 미우라만(三浦) 사이를 갈라 운하로 만들고 그 위에 세운 다리이다. 만제키바시 전망대에 오르면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힌 아소만과 미우라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혜의 군사요지이다.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운하를 파는 바람에 상대마도와 하대마도로 나뉘어졌다.

 

 1896년 2월 고종과 황태자가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파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의 승리로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러시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자 국가비상령이 걸렸다. 끊임없이 동방-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은 전쟁을 결심한다.

 

 러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군의 기습선제공격으로 1904년에 벌인 전쟁이다. ‘왜소한’ 일본군이 예상을 뒤엎고 ‘거인’ 러시아군을 제압함으로써,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1910년 독도를 포함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바로 이 전쟁의 결과이다.

 

 크로파트킹 지휘 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텐(奉天 봉천, 현재의 瀋陽 선양) 대회전(大會戰)에서 맞붙었다. 러시아군이 패퇴했고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았다. 중국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의 제3군은 여러 차례 203고지 공격으로 끝내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했다. 

 

러일전쟁풍자화 ⓒ 위키백과

 

러일전쟁풍자화 ⓒ 위키백과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당시 세계 3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유럽 발틱함대를 보내 일본에 위협을 가하려 했다.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럽의 발틱함대는 기함 스와로프호를 비롯해 전함 8척, 장갑 순양함 3척, 순양함 6척, 장갑해방함 3척, 가장순양함 5척, 구축함 9척 및 공작선, 병원선, 수송선으로 구성되었다. 유럽에서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영일(英日)동맹으로 수에즈 운하를 관장하던 영국은 러시아 함대의 이곳 통과를 불허했다. 러시아 함대를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을 거쳐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을 거쳐 장장 7개월의 항해 끝에 일본 쓰시마 부근까지 북상했다. 러시아 해군은 긴 항해 끝에 염전(厭戰) 의식이 팽배했고 전의(戰意)마저 상실한 상황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가 이끄는 일본 함대의 기습작전으로 5월 27일과 28일 대한해협 부근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때 도고는 일본군함을 진해와 거제의 송진포 및 만제키바시의 리아스 해안기지에서 출항시켰다.

 

 전함 4대, 순양함 8대, 구축함 21대, 어뢰정 60대로 이루어진 도고의 함대는 영일동맹의 덕으로 영국의 신식 군함을 불하받아 전투력이 막강했다. 발틱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과 수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 김동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 김동철

 

 러시아 항복을 이끌어낸 도고는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러일전쟁 승리 축하자리에서 미국 기자가 “세계 해군사에 기리 남을 군신(軍神)”이라고 추켜세우자 그는 “영국의 넬슨과 비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제독에게 비하면 나는 하사관 정도 수준이다. 이순신 제독은 10대 1의 열세한 전력 속에서 승리(명량해전을 말함)로 이끈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말했다.

 

 도고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깨부술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에서 사용한 학익진(鶴翼陣)법을 응용한 ‘도고 턴(Turn)’이란 전술을 펼쳐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었다.   

 

 러시아의 항복과 일본의 승리가 선언되자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 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라 일본은 한반도를,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는 각서를 교환했다. 이 여세를 몰아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시켰고 1910년 8월 29일에는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도쿄 우에노공원 입구에 세워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의 동상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그는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출신 무사로 에도막부(江戸幕府)를 타도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으로 이끈 유신삼걸(維新三傑) 중 한사람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정한론을 주창한 조슈번(야마구치현) 출신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제자들이 뿌린 정한론(征韓論)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에 의해 이뤄졌다.

 

 러일 전쟁이 한창일 무렵, 만주로 출정한 일본군들은 풍토병에 걸려 며칠 만에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일본군의 사망원인은 만주의 수질이 나빠서 생긴 설사에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은 ‘하루리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하는 좋은 약을 만드는 것이 보국하는 길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며 전국에 칙명(勅命)을 내렸다.

정로환은 원래 '러시아를 정벌하는 환약'이라는 뜻의 약이었다.

 

정로환은 원래 ‘러시아를 정벌하는 환약’이라는 뜻의 약이었다.

 

 일본 제약사들은 앞을 다퉈 약을 만들었는데 그중 다이코신약에서 만든 약은 그 효능이 매우 우수해 이 약을 복용한 만주의 일본 군사들은 그 이후 더 이상 배탈과 설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황은 이후 이 약의 이름을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는데 공이 큰 약이었다고 해서 ‘칠 정(征)’과 러시아를 의미하는 일본식 발음 ‘이슬 로(露)’ 자를 써서 ‘정로환(征露丸)’이라 이름지었다. 그후 7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모 제약회사가 일본 기술을 들어와 정로환을 생산해 인기상품으로 만들었다. 그 한자 이름이 ‘정로환(正露丸)’이다.

 

 초겨울 만제키바시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잔잔했다. 그 주변 어민들이 사는 곳 또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 이 다리에 얽힌 사건을 떠올리니 나의 심사는 심란했다.

 

 ‘우리는 지금 국가 안위를 위한 외교와 안보가 튼실한가.’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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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