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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인터뷰 - 최진실

category 문화산책 2016. 8. 9. 19:05

 

                                                                  고인이 된 탤런트 최진실씨. 명복을 빕니다.  





※<아래 기사는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내용입니다.>


 

‘최진실 손은 마이더스의 손’

 

1996년 필자가 쓴 대중문화서 <스타는 밤에도 쉬지 않는다>(우리문학사)의 최진실 편 제목이다.

1990년대 그녀는 방송드라마, 영화, CF에서 억대 개런티를 받는 스타로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그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깜찍하고 앙증맞은 그녀는 10대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앙팡테리블이란 꼬리표를 붙여도 좋을 갑작스런 신데렐라의 등장이었다.

매스컴은 명실상부한 스타로 입지를 굳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이 아이돌 스타는 거세게 밀려온 쓰나미처럼 대중문화계를 휩쓸었다. 이른바 ‘최진실 신드롬’이 나타난 것이다.

‘최진실, 드라마 출연 개런티 3억원’은 당시 스포츠신문과 여성잡지의 1면 톱을 장식하는데 충분했다. 각 신문사 연예부에는 최진실 담당 기자가 있었고, 담당 기자들은 그녀 주위를 맴돌면서 특종 경쟁에 열을 올렸다.

그녀의 주가가 뛰는 만큼 찾는 기자나 PD, 영화ㆍCF 감독들도 점점 수가 늘어갔다. 오죽했으면, 최진실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들이 필자에게 대신 인터뷰를 하는 일까지 빚어졌을까. 이처럼 최진실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일약 억대 스타로 등극한 그녀는 연예계는 물론, 그 시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한 경제연구소에서는 톱스타가 한 해 벌어들이는 수입과 관련, 그녀를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까지 해석했다.

 

최진실은 1988년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이듬해 삼성전자 CF 모델로 등장, 예의 그 깜찍한 모습으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남편 귀가시간은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면서 CF 여왕으로 등극했다. 삼성전자 CF로 꼭 1년 만에 억대 스타로 탈바꿈, 1990년대 내내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별이 되었다.

깜찍발랄하면서도 때론 수수하고 털털한 서민 이미지로 시청자 가까이 다가온 스타. 그녀는 키 크고 깡마르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 미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친근한 이웃집 누이동생처럼 평범하면서 배시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이런 복합적 이미지는 방송, 영화, CF 등에서 색다른 배역에 어울려 팔색조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진흙 밭에서 캐낸 진주’로 비유되면서 대중문화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한창 절정기에는 제과, 샴푸, 음료, 자동차, 가구, 의류 등 광고에 동시 출연해 한 해에 10억원의 수입을 기록, ‘CF 퀸’으로 군림했다. 당시 유행했던 ‘남편사랑은 가끔 확인해봐야 해요’ ‘엄마 딱 하나만 더’ ‘따라 하지 마’ 등의 CF 대사들은 아직도 중년의 귓전을 때리고 있다.

인기와 함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다. KBS, MBC, SBS 등 방송 3社(사)는 드라마 출연 스카우트 열전을 벌였다. 결국 SBS TV 주말극 ‘사랑의 향기’에 100회 출연, 3억원의 개런티를 받아 방송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이 와중에 방송 3사 PD들은 최진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집 앞에서 밤이슬을 맞으면서 三顧草廬(삼고초려)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충무로 영화가에서도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마누라 죽이기’(1994년), ‘별은 내 가슴에’(1996년), ‘그대 그리고 나’(1997년) ‘편지’(1997년) 등에 연속 주연으로 출연했다.

 

‘저축왕 짠순이’

 

영화 ‘마누라 죽이기’를 연출한 강우석 감독은 영화배우 박중훈의 상대 커플로 최진실을 캐스팅해 우리나라 처음으로 코믹 트렌디 드라마의 영역을 개척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겹치기 출연에, 숱하게 밀려오는 촬영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주요 배역이라 해도 스타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피로가 겹치자 당연히 몸에 무리가 왔고 휴식 차 병원에 입원, 링거주사를 맞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의사로부터 보양식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이때다. 대중의 인기는 이렇게 스타를 가만두지 않았다.

억대 스타가 된 뒤에 그녀에겐 ‘저축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버는 대로 저축한 결과였다. 하루 용돈 1만원도 다 쓸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두 번씩이나 재무부(現 지식경제부)로부터 저축왕賞(상)을 받았다. 청와대에 초청돼 대통령상도 받았다.

이때 붙여진 별명이 ‘저축왕 짠순이’였다. 그녀는 데뷔한 지 6년 만에 40억원대의 강남 빌딩 주인이 됐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허름한 빌라에서 수제비를 먹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던 가난과 결별한 것이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그녀는 소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청룡영화제, 대종상, 각 방송사 연말 인기대상 시상식 등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평소에 청바지에 면티, 운동화를 즐겼다.

“또 인터뷰예요? 이제 지난 이야기(소녀 가장, 수제비 같은 가난 관련 이야기) 안 물어볼 거죠. 알았어요. 그러면 회사로 오전에 찾아 뵐 게요.”

회사로 찾아올 때마다 필자는 그녀에게 순대국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런 나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광화문 뒷골목 허름한 순대국밥 집에서 국물까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식당 손님들은 “최진실도 순대국 먹네!”라면서 의아해(?)했다. 그럴수록 대중적 친근감은 새록새록 커갔다.

1998년 IMF 경제위기 때는 자동차 회사 CF에 무보수로 출연해, 국민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겠다는 동참 의지를 보였다. 당대 대중문화계를 풍미하고 있는 톱스타로서 그녀의 이런 처신은 세간의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최수제비'

 

1996년 MBC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에 출연했을 당시 최진실.

S여고 시절, 도시락을 안 싸온 사실을 안 선생님이 그녀에게 자장면이라도 사먹으라고 1만원을 건넸다. 그녀는 중국 음식점이 아닌,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매만지고 왔다. 배시시 웃는 그 귀여운 모습에 선생님도 어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인터뷰 도중, 연예계 데뷔 동기를 묻자, 그녀가 들려준 대답은 이랬다.

“수제비가 지긋지긋했거든요.”

선천적인 끼를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연예계에 데뷔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터. 주어진 운명을 딛고 일어서려는 ‘소녀 家長(가장)’으로서 당당했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중고교 시절 도시락은 안 싸간 날이 많았다. 졸업 앨범을 구입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도 있었다. 가난은 불편했을 뿐, 선천적으로 통통 튀는 끼를 꺾지는 못했다.

편모 슬하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그녀에게 ‘최 수제비’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도 하루 세끼 수제비를 밥 먹듯 먹었기 때문이었다.

“저 지금도 수제비 좋아해요. 수제비 얼마나 잘 끓이는 줄 알아요?”

속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가난의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수제비로 식사를 대신해야 하는 곤궁의 여고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무명시절에 그녀는 CF출연 개런티로 30만원을 받았다. 꽃샘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4월, 여름상품 광고를 촬영하느라 비키니 스타일로 온종일 서른 번씩이나 야외풀장을 드나들면서 받은 돈이었다.

“물에 빠진 생쥐를 생각해 보세요. 하하하. 추웠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요.”

내 손으로 번 돈. 무명의 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일주일 내내 기분이 좋았었다고 했다.

이후 S전자 CF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서울 은평구 Y 빌라 담벼락은 온통 낙서로 도배질됐다. 사인을 받으려는 중고교생 팬들이 밤늦도록 집앞에서 서성였다. 이웃집 사람들은 이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로 다소 번잡함이 있었지만, 한 동네에 최진실이 산다는 데 자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화려한 무대 뒤의 고독

 

1999년 4월 삼성서울병원에서 무료 백내장 수술 후원으로 치료받은 불우 노인들을 위로하는 최진실.

그녀는 유명세를 타는 만큼, 가십거리의 대상이기도 했다. 천정부지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무렵, 화려한 무대의 이면에 가려진 그녀의 뒤안길 이야기는 가십으로 회자됐다.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자연히 그녀의 사생활은 지켜지기 힘들었다. 스타로서, 기자들과 쫓고 쫓기는 관계가 1년 내내 지속됐다. 수많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일일이 응대하기 어려웠다.

억대 스타의 개런티 소식과 함께,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최 수제비’ ‘저축왕 짠순이’ ‘더 이상 수제비는 안 먹어도 된다’ ‘소녀가장’ 등등의 제목이 당시 언론을 장식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였을 텐데도 당당히 밝히는 그녀의 솔직함에 팬들은 더욱 매료됐다. 아니 평범한 자신들과 비슷하다는 공통분모를 느끼면서 친밀함을 더욱 갖게 되지 않았을까. 萬人(만인)의 연인으로서 대중의 인기는 꺾일 줄 몰랐다.

인기가수 변진섭씨와 열애설에 이은 결혼설과 결별로 이어지는 아픔(?)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 나이 또래 선남선녀가 가질 수 있는 젊음의 특권이기도 했다. 자칫 도전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담하게 버텨나갔다. 필자는 그녀의 작은 몸집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아나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한없이 남의 부러움을 사고, 행복만 펼쳐지는 듯한 그녀의 삶에도 질곡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했다. 그 질곡의 삶은 극적인 드라마를 연상시켰고, 때론 충격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시간대별로 굵직굵직한 사건만 간추려 열거하면 이렇다.

 

▲1994년 매니저 배병수씨가 그녀의 운전기사로부터 살해당한 사건 관련 검찰조사를 받음.

▲2000년 연하의 야구선수 조성민(당시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씨와 결혼, 2002년 별거, 2004년 합의 이혼.

▲두 아이(아들 7살, 딸 5살)를 기르는 싱글 맘, 그리고 활동 중단(이혼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루머에 시달렸음).

▲2005년 드라마 ‘장밋빛 인생’으로 연예계 재기 성공(최고 시청률 47%, 남편의 배신과 암으로 시달리면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맹순 역으로 팬들의 박수갈채 받음).

▲2008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줌마렐라(아줌마와 신데렐라의 합성어) 신드롬 일으킴.

▲두 아이의 성씨를 자신의 성씨인 최씨로 바꾸는 워킹·싱글 맘 모습 보임.

▲최근 탤런트 안재환 죽음과 관련, 사채업자說(설) 악플로 고통 겪음.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 없는데…”라고 말한 뒤 자살.

 

그녀의 자살은 그토록 끔찍이 아끼던 첫 아이의 가을운동회를 며칠 남겨둔 때였다. 굴곡의 순간순간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줬던 그녀는 싱글 맘들의 희망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질긴 삶의 끈을 그만 놓아버리고 만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이버 인격殺人의 희생양(?)

 

최진실은 2000년 12월 조성민과 결혼했지만 2년 후 파경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은 사채업자설을 퍼뜨린 악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았던 악플 사건은 사이버 인격殺人(살인)으로 규정돼 국회에서 ‘최진실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네티즌들의 ‘표현의 자유’냐, 악플러의 ‘범죄행위’냐를 놓고 與野(여야) 간 신경전이 한창이다.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과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한 신경정신과 의사 말에 따르면, 악플러의 내면세계는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고, 초등학생 악플러처럼 본능적인 공격성, 비열함, 무책임함 등이 익명성에 가려져 등 뒤에서 칼을 꼽는 행위로 나타난다고 진단한다.

 

악플러들에게 대중적 스타 연예인은 돈, 명예, 우월감 같은 ‘잘난 점’을 가진 공격 상대일 뿐. 이들에게 스타는 나의 열등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가해자로 인식되기도 한단다. 그래서 제거돼야 할 존재, 무엇보다도 내 모습이 이 정도까지 못나 보이는 이유는 잘난 저들 때문이라고 적개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린치이자 테러일 것이다.

 

‘보수적 분위기 속 이혼녀·워킹 맘으로 살기 어려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스타의 자살에 한국사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최진실이 줄리아 로버츠나 안젤리나 졸리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고 말하면서 “(경제적) 발전은 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할 수 있는 고통을 보여주었다”고 논평했다.

 

<타임>은 또 “온라인에서 끊이지 않는 악성 댓글이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다”면서 “독신으로서 워킹 맘인데다 한국에서 여전히 ‘천민’ 취급 받는 이혼녀 신분이었다는 사실이 자살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최진실은 한국에서 금기시되는 이혼모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했으며, 싱글 맘이 환영 받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두 얼굴을 갖는 배우의 운명

 

배우는 양면의 얼굴을 가지는 운명체다. 배우는 자연인으로서 나(에고)와 무대 위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는 등장인물(파르소나·가면)로서 각기 다른, 다양한 삶을 경험한다. 원로 연기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개성 있는 캐릭터의 특정 인물을 맡아 내면 의식에 몰입한 채 한동안 살다 보면, 나 아닌 나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나와 배역 사이의 역할 혼동, 이른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자연인으로서 내면의 고독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배우는 무대 위에서 자기 속내를 함부로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한 마스크 속에 감춰진 또 다른 고독일 것이다. 얼굴이 알려진 公人(공인)으로서 행동반경 또한 좁다.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기가 높을수록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의식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때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스카프로 꽁꽁 덮고 숨어야 하기에 자연히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다.

더욱이 속상한 일을 억지로 감추고 코믹한 연기를 해야 한다면? 이 또한 감정조절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힘들 수밖에 없는 게 배우의 운명이다. 우리는 때론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이미지에 열광하고 박수 치지만, 그 깊은 속내의 숨은 고독을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 남동생 진영씨와 수제비를 물리도록 먹은 탓에 수제비 끓이는데 고수의 경지까지 갔다는 그녀는 대중적 친근함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만인의 애인이었고, 누나였고, 예쁜 동생이었으며 국민배우였다. 가난했지만 물 속에서 막 튀어나온 돌고래의 발랄하고도 싱싱한 이미지를 가졌던 그녀는 내면의 고독을 그렇게 숨기고 살았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 “두 아이를 부탁해”

한 줌의 재로 남은 최진실. 그녀의 자살 관련 직접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증권사 여직원 백씨는 9월 30일 경찰 조사에서 “언니(최진실)가 전화를 걸어, 지금 병원에 있는데 너무 아프다” “많이 배우신 분이 왜 그랬나. 당신도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다” “우리가 어디선가 좋은 인연으로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했다. 이때 백씨 자신은 “너무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최진실은 죽음 당일인 10월 2일 새벽 0시46분과 47분, 두 차례에 걸쳐 루머를 유포한 백씨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백씨는 며칠간 잠을 못 자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사인을 보낸다고 한다. 가장 아끼던 물건을 남에게 선뜻 주기도 하고, 결행에 앞서 역설적으로 살고 싶다는 사인을 보낸다고 한다. 메모, 편지, 문자 메시지, 통화 등 어떤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하건 자신의 속내를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문자메시지는 “두 아이를 부탁해”였다. 우리는 그녀가 보낸 수많은 암시의 텔레파시를 받았지만, 그 뜻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모른다. 아니 메시지의 의미를 알았다 해도, 속수무책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지 모른다.

최진실의 연예계 친구들은 그녀가 평소 듣기 좋아하고 하기 좋아했던 말이 “아이 러브 유”라고 했다. 그리고 10월 9일 매스컴은 두 자녀가 외할머니와 함께 엄마가 묻힌 납골묘를 찾았다고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영정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는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부디 이승의 고통을 잊고 저승에서 평안히 영면하시길….


김동철 대중문화 전문기자 youth5601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