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인생 2막 1장 - 어느 베이비 부머의 인생역정

category 문화산책 2016. 8. 9. 19:15

♦인생 2막 1장

 

어느 베이비 부머의 인생역정

 

-퇴직, 방황, 좌절, 재취업의 인생길 파노라마

외국기업(7년)-대기업(15년) 등 22년 근무한 퇴직자 Y씨(54)

퇴직 후 5년 동안 방황과 좌절의 시련 겪어,

술 한 잔에 스트레스 날리며 명상과 걷기로 건강 다져

지난해 월급 2백만원 미군부대 보안경비요원으로 재취업



글/  김동철 월간중앙 기획위원 youth560105@hanmail.net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납니다. 그래도 지금 행복합니다.’

‘인생은 공(空),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우리시대 베이비 부머의 명암

세계 최빈국에서 단군 이래 최대호황 맛본 베이비 부머들


베이비 부머 세대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1963년 사이에 태어난 약 714만명의 거대한 인구집단을 말한다. 이들이 태어난 시기의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수준으로 60달러 정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전쟁 후 폐허 속에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초근목피의 시절을 거친 베이비 부머들은 70~80년대 비약적인 경제발전에 참여한 ‘산업역군’으로서 한 몫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 경제권의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는 데 당당한 역할을 했던 세대다.

이들은 콩나물시루 같았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3부제 수업을 받았고, 56년생부터는 은행 알을 굴려서 중학교를 추첨 받는 첫 무시험시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57년생까지는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목표 아래 당시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70~80년대(86년 민주화시대 개막) 민주화 투쟁과 공안정국의 권위적 통치도 경험했다.

한편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대표되는 신세대 미팅문화의 달콤한 낭만도 만끽했다.

전문직이나 자영업자가 아닌 취업전선에 배치된 샐러리맨들은 80년대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덕을 톡톡히 봤다. 나날이 늘어나는 일자리에 취업의 문턱을 비교적 쉽게 넘었다. ‘평생직장’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는 호사도 경험했다.


IMF 직격탄, 구조조정 후유증 겪어


그 후 97년 국가부도위기라는 IMF 경제 사태를 맞아 선배들이 대거 회사로부터 등 떠밀려 차가운 거리로 내몰리는 살풍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른바 구조조정이었다.

이런 처참한 분위기를 경험한 베이비 부머들은 ‘살아남은 자의 비애’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선배들이 경험한 처참한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미래예측, 시시각각 벼랑 끝으로 몰리는 불안감 속에서 그저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는 ‘좀비인간’이 바로 베이비 부머들의 자화상이었다.

회사 인수합병과 인원 구조조정으로 대표되는 IMF사태는 동시대 샐러리맨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30대 조기퇴직을 뜻하는 ‘삼팔선’과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 그리고 56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이라는 ‘오륙도’까지 자조 섞인 유행어가 시대상을 반영했다.

‘월급쟁이’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은 고통에 일그러져 찌든 몰골로 표현됐다.

사기업에서 50세 근로자는 이미 자신의 명줄을 회사에 담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대 50대 지천명(知天命)들은 일찍이 ‘뒷방 신세’로 전락했다. 젊은 시절 갈고 닦았던 빛나는 노하우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박물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구조조정을 몰고 온 IMF의 직격탄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햇볕’처럼 가슴 깊숙이 뚫고 들어와 박혔다. 당하는 샐러리맨과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가족들 모두에게 깊은 한숨과 고통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혼, 청소년 일탈 등 가정파괴와 노숙자 양산, 실업률 증가 등으로 국가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속도감 내는 고령화시대, 준비 없는 노후신세로 전락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진행이 속도감을 더해가고 있다. IMF 이후 사회, 경제, 심리적 기반이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변혁의 폭풍 속에 휘말리면서 전혀 새로운 가치 개념이 등장했다. 이른바 ‘인구 재앙’(Ageing - quake)이다.

통계청(2007년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79.5세. 남자는 76.1세이고 여자는 82.7세이다. 기대여명(현 나이에서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기대치)은 환갑까지 생존한 경우 남자는 30.7년, 여자는 36.6년을 더 사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남자는 90.7세, 여자는 96.6세로 ‘100세 시대’ 개막이 눈앞의 현실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50세에 퇴직을 한다면 나머지 30~40년을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보내야하는 지에 대한 베이비 부머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사회복지체계 등 사회안전망이 충분하지 못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속도감 있는 고령화 진행은 곧 국가적 재앙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베이비 부머에 해당하는 일본의 단카이(團塊) 세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에서 1950년 사이에 태어난 700여만명의 거대 인구 집단이다. 초고령사회(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이상)에 돌입한 일본의 경우, 정부차원에서 고령자 고용을 의무화하는 ‘정년연장법’을 시행해 현재 60세로 되어있는 정년을 2013년까지 단계적으로 늘려 65세로 규정했다.

필자는 고령화 시대 사회복지문제와 관련, 일찍이 고령화 사회를 맞아 시행착오를 경험했던 일본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벤치마킹한다면 보다 합리적 대안과 미래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낀세대’ 베이비 부머들, 부모-자녀 부양에 등골 빠져

 

우리나라 베이비 부머들은 전통관례에 따라 부모를 모시는 역할을 해왔지만 정작 자신들은 더 이상 자식세대로부터 부양을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어정쩡한 위치에 낀 샌드위치 ‘낀세대’다. 신세대와 쉰세대 사이에 있는 끼어있는 ‘낀세대’는 자신의 노후생활을 준비할 틈이 없이 자녀들의 육아, 교육, 결혼까지 도맡으면서 허리는 휘어지고 어깨는 축 쳐진 ‘앉은뱅이’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노후 준비가 안 된 장수(長壽)세대는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베이비 부머들은 미래 ‘장수재앙’의 소용돌이에 휘몰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안정된 궤도에서 이탈한 채 부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이들의 불확실한 미래는 그래서 더욱 심각하다. 오늘날 베이비 부머 문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방치시켜놓을 수 없는 사회적 핫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

 

이와 같은 암울한 사회적 배경 아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재기’를 한 주인공을 찾아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자존심을 구기면서 누구 하나 선뜻 나서기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과연 인터뷰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있다! 이 시대 베이비 부머들은 각자 개인의 삶을 영위해 가지만 거기에는 개인의 자화상 이상의 것, 즉 거대 집단인 베이비 부머의 생활상을 공통적으로 대표하는 숨은 이미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수소문 끝에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그는 80년대 초 다국적 해외기업에서 출발, 국내 대기업에서 임원급인 본부장으로 명퇴한 샐러리맨 22년 경력의 Y씨(54)였다.

명퇴 후 5년여 동안 온갖 궂은일을 다하면서 인생 밑바닥을 경험한 그의 첫인상은 듬성듬성 빠진 머리숱과 주름 잡힌 얼굴로 영락없는 초로의 고단한 인생을 보여주었다.

그는 취재편의를 위해서인지 자필 이력서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인터뷰 전에 ‘조건’을 내세웠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남이 알만한 사실은 익명으로 처리해줄 것과 사진을 게재하지 말 것’을 제의했다.

그에게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자 그는 흔쾌히 응했다.

지난 시절 소위 KS출신이라는 화려한 학력을 가진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였지만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마당에서 과거의 화려한 영광의 부활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학생의 전부는 공부일지 몰라도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어느 철학자가 말한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는 말에 더욱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직 후 지난 5년 동안의 생활을 그는 “‘개고생’의 나날이었다”며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는 속어 “‘아더매치의 시절’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서러웠던 시절을 겪은 그는 지난해 미군 보안경비업체에 재취업, 현재 모 지역 미군부대에서 월급 200만원을 받으면서 근무 중이다.

마침 인터뷰 날은 그가 전날 12시간 근무를 끝내고 쉬는 날이어서 시간적으로 좀 여유로웠다. 3시간여 동안의 인터뷰(나중에 몇 차례 더 보충취재가 있었다.)가 끝날 무렵 그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푸근해보였다.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신 느낌입니다.”

헤어지기 전 그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가 건네준 것은 하얀 종이 한 장이었다.

“가면서 읽어보세요.”

밤 11시. 검은 등산복 차림의 그는 “집으로 가는 차가 끊길지 모른다”면서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 손에는 그가 건네준 하얀 A4 용지 한 장이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버스 간에서 A4 용지를 펼쳐보았다. 시가 적혀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가 평소 애송한다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시를 다 읽은 나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좀 더 색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도종환의 시는 그가 살고 있는 지방 도시 변두리 버스정류장에 붙은 시라고 했다. 그는 ‘하도 좋아서’ ‘내 인생 같아서’ ‘이 시대 베이비 부머들을 잘 그린 것 같아서’ 적어가지고 다녔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더 보충이라도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살면서 몇 차례 인생 터닝 포인트가 있다고 하잖아요. 저 또한 전도양양하게 고속도로를 씽씽 달릴 줄 알았어요. 남보다 못한 것도 없다는 자만심도 있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비포장도로를 달려야할 때도 있었고 자갈길, 오지의 비탈길을 가야할 때도 있었지요. 때론 길이 아예 안 보일 때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야할 때가 있더라구요. 정말.”

 

‘눈물로 빚은 소주, 눈물 젖은 빵’

 

늦은 시각 버스는 도착시간과의 싸움을 하려는 듯 속도를 내고 있었다.

시를 다시 한번 읽고 나자 Y씨와 빈대떡 집에서 나눈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느릿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Y씨는 인터뷰 도중 인생의 격한 변곡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상념에 잠기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서 한잔씩 들이켰다. 마침내 소주 3병이 되었다.

그에게 소주는 ‘눈물로 빚은 생명수’였으며 빈대떡 안주는 ‘눈물 젖은 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네, 평소 소주 한 병에 이차로 맥주 조금 마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 이야기를 후련하게 털어놓으니까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좀 오버한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이차라도 가서 맥주로 입가심할까요.”

“아녜요. 집에 가야해요. 낼 근무 날이거든요.”

그는 그렇게 서둘러 갔다.


‘개천에서 용난다?’


Y씨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2년 미국계 다국적기업인 K회사에 입사, 야심차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어도 국내기업보다 더 많은 두둑한 월급봉투를 받는 날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전도양양한 앞날에 빨간 카펫을 깔아주던 행운의 여신이 핑크빛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회사생활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가끔씩 기억되는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추억은 빛바랜 옛날 사진처럼 기억에서 희미하게 지워져갔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형은 중학교만 마치고 더 이상 진학을 포기했고, 동생은 대학을 포기하고 상고를 들어갔어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더 이상 생활능력이 없었고, 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제가 대학 1학년 때인 45세에 돌아가셨어요.”

그런 빈한한 가정에서 KS마크를 단 그는 집안의 반짝이는 희망이자 기대주였다.

외국인 회사여서 실무 비니지스 영어가 필수였지만 국내 영업 부문을 담당하던 그로서는 영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담당 부장은 영업실적이 좋은 그가 실무 영어가 좀 달리는 것을 이해해주었고 브리핑 때마다 대신해줬다. 그러는 통에 그는 영어와 점점 멀어져 갔다.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어도, 언젠가 영어를 꼭 정복하리라 결심했지요. 솔직히 영어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공부 아닙니까.”

입사 8년째인 1989년 그는 회사를 옮겨야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86년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88년 올림픽을 정점으로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가 더 커졌잖아요. 당시 회사 노조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목청을 한껏 높이고 있었어요. 인사권 등 경영에 간섭을 하기 시작하자 미국인 사장은 ‘국내 공장 문을 닫고 회사를 해외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발표했어요.”

“일단 시련이 온 거네요.”

“시련이랄 것까지는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갈 곳이 많았어요. 평생직장으로 알고 일 해왔는데 국내공장 문을 닫는다고 하니 고용불안이 문제가 됐어요. 그래서 경력사원으로 국내 에너지 계통 대기업으로 옮기게 됐지요.”

1989년 H그룹에 에너지 분야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부지런한 성품에 뛰어난 대인관계를 잘 활용한 결과, 영업성과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다른 사원들보다 승진이 빨랐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상황이었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91년부터 94년까지 군대와 정부기관을 상대로 영업을 담당하는 과장이었고 94년부터 97년까지 대전충청 지사장을 맡았고 이어 99년까지 3년 동안 임원급이 맡는 호남본부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했다.

 

“내 인생의 전성기?”

 

"호남본부장 때는 비서와 기사 딸린 승용차를 받았고 관사생활을 했어요. 영업실적도 좋을 때라 미래가 확 열리는 기분이었죠. 전성기라면 아마 그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성기 때 겪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을 텐데요.”

“한마디로 ‘한량과’ 생활을 했어요. 입사 초기부터 전국을 무대로 영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덕택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거래처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잘 맺다보니까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자연히 영업실적도 좋았구요. 그러다보니 한량 근성이 나왔던 겁니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고, 놀기도 열심히 했습니다.”

“주로 어떤 놀이에 탐닉했나요.”

“본부장이 되자 주위에서 찾는 사람이 많았어요. 특히 지역 기관장들과 골프모임, 술 모임 등이 잦았어요. 그야말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세월이 흘러가는 태평성대였지요. 예향인 호남지방 유명한 맛집이란 맛집은 모두 다 섭렵했어요. 오히려 지금도 그곳 출신 사람보다 길도 더 많이 알고 맛집도 더 잘 알아요.”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는데 첫 번째 행운이었을까요.”

“아니요. 고등학교 합격했을 때가 가장 기뻤어요. 그 다음이 본부장 시절이고 나머지 행운은 아직 안 왔네요. 언제 올라나요. 하하.”

“100세까지 산다는 고령화 사회가 아닙니까. 앞으로 더 멋진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글쎄요. 퇴직 후 지난 5년 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젠 누가 같이 동업하자거나 도와달라고 하면 도망가고 싶어요. 정말 살아생전에 제3의 전성기가 올지 모르겠어요.”

“맛집 순례 이야기 좀 해보시죠.”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2번국도 옆에는 남도의 명물들이 즐비했어요. 영암 독천의 세발낙지, 벌교-순창의 참꼬막과 짱뚱어, 목포-영암 사이의 무화과 열매, 고흥 녹동(도양)의 싱싱회, 광양 섬진강 하류 진월의 재첩과 전어, 하동 화개장터, 진주 남강 다리 밑 민물장어 연탄구이, 마산 월남다리 옆 아구찜, 김해-진영-덕산의 단감 등이 있었지요.”

“참 많이 다니셨네요. 맛 기행문을 써도 될 것 같은데요.”

“또 있어요. 함평 한우 육회와 바지락 죽, 광주 양곱창, 담양 떡갈비, 강진 한정식, 장흥 민물장어, 해남 닭육회, 구례 말뚝감, 나주 보신탕, 화순 약초막걸리, 목포 홍어회, 장성 민물메기탕, 고흥 감성돔과 광어, 김제 산나물 파전과 백합조개, 고창 장어와 복분자술, 남원 숙회와 참게탕 등등에, 방망이처럼 생긴 보해소주 골드가 있었죠. 줄줄이 읊다보니 아! 옛날이 그립네요. 풍류와 맛의 고장에서 세월은 그렇게 맛있게 흘러갔습니다. 하하하.”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입니까.”

“장흥-강진 아래 관산반도로 넘어가는 솔치재(솔재) 넘기 전에 좌측으로 꺾어져서 바닷가에 자리한 곳인데 싱싱회와 함께 뻑적지근하게 나오는 남도 토종 쓰끼다시가 입을 딱 벌어지게 하지요. 그리고 아! 창문 밖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바다 내음, 그리고 보해소주 한잔... 신선이 따로 있나요. 정말 다시 가고 싶은 곳입니다.”

“맛이 주는 행복감이 있잖습니까. 한 평생 행복감을 모두 만끽한 것은 아닌가요.”

“네, 그렇다고 봐야죠. 그리고 말입니다. 마시고 마시다 지치면 바닷가에 나가 바람 쏘이고 남해 바다에 발 담그고 있으면 어느새 술도 깨고 고함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감격에 겨운 즐거운 함성이지요. 솔치재 너머 절경인 약산도에 있는 후배집, 고교선배인 군수님, 신문사 사장님 등을 찾아가는 날이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의 황홀경에 싸인답니다. 하하.”

Y씨의 이런 ‘태평성대’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첫 직장인 외국인회사에서 국내 대기업인 H그룹으로 옮겼던 그는 2000년 회사가 J그룹에 흡수합병되자 하루아침에 난감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당시 H그룹 사주는 정부의 뜻을 전폭적으로 따르고 있던 터라 정부의 뜻에 따라 서슴없이 회사를 H그룹에 내주다시피 했다. 사주의 결정이 이렇다보니 그로 인해 퇴직한 사람들만 100여명이 넘었다. 이들은 “사주가 정부의 눈치를 과도하게 본 나머지 알아서 긴 꼴”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Y씨는 앞으로 나아갈 진로가 불투명해졌다. 인수한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Y씨는 영락없는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IMF 이후 유행하던 M&A가 우리 회사까지 적용된 겁니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일단 회사가 일단 없어지는 상황이다 보니 하루 아침에 ‘점령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패잔병’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점령군’은 압박을 가해왔어요. 저는 회사를 떠날 것을 종용받았지만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오기가 발동됐던 겁니다.”

“생존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상황이 되면 개인의 노력은 사실상 하찮은 것이 되지요. 그렇다고 노조라는 집단적인 힘을 이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자리가 없어질 상황이니 오죽 난감했겠어요. 불면증을 그때 처음 경험했어요.”

결국 언젠가 잘릴 운명이었지만 그는 지방 도시의 직영 주유소 소사장으로 전근됐다.

“굴욕적이지만 일단 살아남은 셈입니다. 본부장에서 부장급으로 지위가 강등되어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았어요. 그래도 깎인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나오니 그런대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어요.”

“지위강등에 감봉까지, 샐러리맨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지요.”“그렇습니다. 하루하루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다가고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어요.”

‘패잔병’이 된 그는 지방 주유소 소사장으로 4년 근무 후 2004년 명예퇴직으로 회사를 나왔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합병당한 ‘패잔병’은 인수한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그동안 비바람을 피해주었던 비닐하우스가 없어졌을 때의 당혹감, 야생화로서 살아가야하는 운명이 시작된 겁니다.”

“난감했겠습니다. 그때 앞으로 먹고살 계획을 세웠나요.”

“계획이고 뭐고 한 동안 멍한 상태로 지냈어요. 생각하면 막막했지요. 평생직장인 줄 알고 다녔고 회사가 끝까지 보호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특히 공부 잘 해서 회사에 취직했고 펜대로 먹고살던 화이트 칼라들, 즉 ‘먹물’들은 기술자인 ‘쟁이’들보다 생존능력이 훨씬 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과 영업실력을 재활용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요.”

“모르시는 말씀, 요즘 40대 후반에 거의 다 나가는 판에 누가 그 나이에 임원 경력을 가진 사람을 데려다 쓴다는 말입니까. 고참 한 사람 인건비면 신입사원 3~4명을 쓸 수 있는데요.”

“사실 노하우가 무루 익은 경력자의 조기 퇴직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지요.”

“요즘 대학 졸업한 젊은 층도 일자리가 없어서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인 마당에 우리 같은 어정쩡한 낀세대들요? 정말 갈 데가 없어요. 아니면 아예 눈높이를 낮춰서 아파트 수위라도 들어간다면 모를까요.”

“쫓겨나던 날 동병상련을 앓던 동료들 하고 술을 얼마나 퍼마셨던지 인사불성으로 집에서 그만 대성통곡을 했대요.”

“쫓기듯 바쁜 회사 생활을 하다가 찾아온 휴식은 꿀맛이 아닐까요.”

“처음 몇 달은 좋았어요. 회사 나가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진짜 스트레스가 바로 집에 있었던 거예요.”

“어떤 스트레스가요.”

“몇달 동안 백수로 지내다보니까 마누라 눈치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몸 건강한데 맨 날 술만 푸고 다니느냐’는 말에 그만 자존심이 상한 거지요.”

“어떻게 가정위기를 넘겼습니까.”

“제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평소 활동적인 아내는 제가 퇴사하자마자 빈대떡 프렌차이즈 점을 시작했어요. 딸아이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아들은 그 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고생했지요. 다행히 아이들이 실직한 애비 맘을 잘 이해해주었어요. 고맙죠. 그래서 행복합니다.”

 

두 자녀와 아내

 

그는 83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 결혼을 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여인과 결혼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속도위반인지 몰라도 그해 11월 딸이 태어났고, 2년 뒤 아들이 나왔다.

“저는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한 게 지금 와서 보니까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 말씀에 ‘자식농사 일찍 짓는 것도 재산’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딸애가 28살, 아들은 26살이에요. 둘 다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 다니고 있어요. 아내는 큰 욕심 안 갖고 가게를 하는데 그런대로 잘 되는 편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을 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일단 집안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요. 제 앞가림이나 잘 하면 되니까요. 친구들 가운데 늦둥이를 둔 경우와 비교하면 참 다행인 셈이지요.”

“아내와 자식의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 참, 마누라 자랑 조금만 할게요. 제 마누라가 가끔씩 사고를 쳐요.”

“무슨 사고요.”

“아 글쎄 매스컴을 잘 탄다는 이야기입니다. 16년 전에는 MBC ‘싱글벙글쇼’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혼일기 원고를 보내서 채택되는 바람에 푸짐한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는 지방 방송국 창사특집 쇼에 나가서 젊은 애들의 튀는 노래를 불러 대상을 탔어요. 그리고 이어서 몇몇 방송사 노래자랑에 나가는 바람에 자연히 ‘매스컴 탄 여주인’이 운영하는 빈대떡집이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더란 말입니다. 하하.”

“부인이 안 계셨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이가 없으면 잇몸이 역할을 한다고 제가 실직 되자마자 마누라가 생활전선에 나서는 바람에 그나마 제 어깨가 좀 덜 무거웠지요.”

“인터뷰 시간이 많이 흘러가네요.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오늘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저 혼자 살아요.”

“예, 혼자요. 왜요.”

“마누라는 지방에서 딸과 함께 지내고 있고 아들은 서울서 원룸생활을 하고 있어요. 딸은 애인이 있어 곧 결혼할 것 같아요. 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온답니다. 제가 백수생활 5년을 했잖습니까. 그 때 아들은 학교 다니면서 안 해본 알바가 없었어요. 다 못난 애비 때문이지요.”

“아들은 어떤 알바를 했습니까.”

“시간당 3천 원짜리 편의점 점원부터 식당 참숯불 피우는 일, 아파트 판촉물 돌리기, 과외선생, 피자 배달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너무 맘 아파하지 마세요.”

“아! 참, 근데 아들 녀석이 아직 철이 덜 난 것 같아요. 지난달에 첫 월급을 탔는데 글쎄 애비를 ‘개털’ 취급한 거 있잖아요. 그래서 동호회 인터넷 카페에다 아들 욕 좀 했어요. ‘이눔의 시키! 불효막심한 놈’이라고요. 하하하...”

“어떤 사연입니까.”

“아 글쎄 제 엄마한테는 66만 원짜리 한방생화장품, 57만 원짜리 최신식 휴대폰, 13만 원짜리 가방을 사줬어요. 그리고 예비 매형에게는 10만 냥짜리 남성 기초화장품을 사줬지 뭐예요. 근데 나한테는 6만 원짜리 골프 방수방한모가 고작이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미우세요.”

“아니죠. 아들도 미안했던지 ‘한턱 쏜다’고 하길래 쑥스럽고 짜한 마음이 들어서 ‘됐다. 먹은 걸로 하마. 그랬죠.’ 아들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참 착은 구석이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백수 아버지의 고물 핸드폰을 바꿔주었어요. 그만하면 착한 편이지요. 아들도 당신처럼 기자를 하고 싶어 했는데 졸업 후 조그만 잡지사에 들어갔다가 그만 아니다 싶었는지 금방 나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대기업에 들어갔어요. 잘 한 건가요.”

 




보금자리는 반 지하 원룸과 1t 짜리 트럭

 

“아까 집이 어디라고 했지요.”

“집이요? 경기도 시골의 아름다운 산비탈 아래 4평짜리 반 지하 원룸이에요. 300만원 보증금에 월세 30만원인데 참 편한 보금자리예요. 오늘은 술 마시는 날이라 차를 안 가져왔어요. 여기서 전철타고 버스로 갈아타면 돼요.”

“생활 근거지가 서울이다 보니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군요.”

“참 원룸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최근에 취직한 아들에게 원룸 하나 얻어줬어요. 그동안 월급타서 조금 모아둔 돈으로 말입니다. 이제 저도 서울에서 잠을 잘 아지트가 하나 생긴 셈입니다.”

“언제부터 혼자서 살았어요.”

“백수가 된 이후부터이니까 한 5년 되네요. 후배와 사업하면서, 동생공장일 도와주면서 주로 경기도 인근 시골집에서 살았어요.”

“아내가 있는 집엔 언제 가나요.”

“주로 토요일마다 밀린 빨랫감 가지고 마누라한테 가지요.”

“그러면 평소 식사도 혼자서 해결하겠네요.”

“그렇죠. 가끔 씩이요. 친구나 옛날 동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그래서 밖에서 해결하는 때가 많아요. 그래도 불량주부 5단 정도는 된 답니다”

“트럭에서 잔다는 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네 저는 지난 5년 동안 1톤 트럭을 몰고 다녔어요. 그게 참 쓸 모가 많아요. 친구 만나서 술 마신 날이면 집 방향의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생수 한 병 사들고 가서 자면 찜질방 이상이에요. 편안하고 아늑하고.”

“그래도 잠자리가 불편할 텐데요.”

“아냐요. 전 노숙자 체질인가 봐요. 하하.”

인터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가슴 한 켠에 숨겨놓은 이야기들이 실타래 풀리듯 나오기 시작했다. 마신 술잔에 비례해서 이야기의 가짓수 또한 늘어났다. 그런데 좀 비극적이고 슬픈 사연들도 있었다.

“제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보면 ‘자취인생’이었어요. 영등포에서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미아리 시장에서 생선장수를 하시는 바람에 늘 식사당번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잠시 해방됐고 대학가서도 자취인생, 회사원 때 지방 근무하느라 자취인생, 오십 줄에 들어선 이 순간에도 자취인생입니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불 꺼진 방에 혼자 들어가는 심정이 좀 서글플 때도 있어요.”

“사람의 운명은 모두 다 다른 모양입니다.”

“글쎄요, 각자 타고난 팔자가 다르겠지요. 저 처럼 가족이 있어도 홀로 살아야하는 운명도 있고요. 근데 혼자 살면서 늘은 건 술이에요. 혼자서 적적하고 심심하다 보면 반주를 핑계 삼아 한잔씩 한다는 말씀입니다.”

“홀로서기 연습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장수시대에 노후준비를 위해서라도.”

“그런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가사와 육아 등에서 남녀의 역할 분담이 더욱 필요할 것 같아요. ‘사내 녀석이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유교적 배경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어진 것 아닐까요.”

“혼자 생활이 몸에 배었다지만, 그래도 피곤할 때가 있을 텐데요.”

“인생이 바로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신세 아닙니까.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것이고요. 저도 때론 아내가 차려주는 뜨끈한 밥상을 받고 싶지요.”

“혼자서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세요.”

“일찍 귀가해서 밥해먹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종교방송이나 흘러간 옛노래, 그리고 재미나는 드라마를 보는 낙으로 산답니다. ‘속물’ 생활이지요.”

“기억력이 상당히 뛰어난 것 같습니다만.”

“예 그런 말을 많이 들어요. ‘쓸데없는 것까지 다 기억하는 남자’라고 말입니다. 동호회 카페에 글을 많이 올리는 편인데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 사회생활 추억이 끊임없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거예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잠도 잘 와요.”

“모조리 기억하면 너무 많은 콘텐츠 때문에 주체할 수 없어 고통스럽다는 말도 있던데요.”

“그래서 좀 잊고 살라고 해도 잘 안 돼요. 비극적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들을 합니까.”

“별의별, 쓸데없는 기억들이죠. 초, 중, 고, 대학, 군대, 회사 때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가 주류이지요. 초등학교 때를 예로 들자면 스케이트 잘 타던 아이, 한복 입고 춤 잘 추던 아이, 피아노 잘 치던 아이, 뜨개질 잘 하던 아이, 무지 잘 달리던 아이, 고무줄 선수, 찜뽕 선수, 그림 잘 그리던 아이, 산토닌 회충약을 사탕인줄 알고 먹고 배탈난 아이, 옥수수가루 빵 내기를 휩쓸던 씨름판 왕자, 동아 수련장을 가지고 다닌 던 아이, 표준전과를 안 가져와서 선생님에게 벌 받은 아이, 수업 중 ‘새소년’ 잡지 보다가 들켜서 빠따 20대 맞은 아이 등등이지요.”

“정말 기억력이 대단하군요. 지금도 예전 친구들을 만납니까.”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몇 그룹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마당발이거든요. 돈은 안 생기지만 오라는 데는 많아서 동분서주합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은 저를 두고 한 말 같아요. 하하.”

“첫사랑이 생각날 때 있어요.”

“그럼요, 첫사랑을 만난 적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더군다나 첫사랑이 다시 첫사랑을 하길 원한다면요, 하하하.”

“농담이시죠.”

 

동업자의 자살

 

Y씨는 실직 후 채 1년이 안 돼 서울 을지로 중부시장에서 건어물 소매업을 한 적이 있었다. 백수로 지내는 게 답답한 나머지 친구와 같이 시장 모퉁이에서 시작한 첫 사업이었다.

“직장생활만 하다가 장사는 처음이었는데 성과는 어땠나요.”

“용돈 벌이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넥타이에 펜대를 쥐던 샐러리맨이 시장 통에서 살아남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지요. 평생 시장에서 장사한 사람들과 경쟁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는 게 대단한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처음엔 겁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이 의욕만 가지고 덤벼들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무모했지만 얻은 경험도 있겠지요.”

“경험이 있지요. 송충이는 소나무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일단 한번 패했지만 또다시 도전을 했나요.”

“저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1t 트럭을 사서 경기도 일대를 몰고 다녔어요. 작은 텃밭이나마 얻어서 농사를 짓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였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습니까.”

“그때 제가 다닌 동선을 그려보자면 광주, 용인, 이천, 곤지암, 의정부, 남양주, 포천 등지입니다. 지금도 그 지역들을 생각하면 한숨과 눈물이 납니다. ‘개고생’을 한 곳들이니까요.”

“그래서 농사를 지었습니까.”

“아니요, 제가 이러저리 방황을 할 때 마침 대학후배의 연락을 받았고 동업을 하게 됐어요. 후배는 대기업을 나와서 식품가공공장을 하고 있었어요. 좀 도와달라는 말에 그만 합류를 했지요.”

“어땠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어렵게 유통을 하고 마진을 먹었습니다만 늘 쪼들리는 거예요. 시장에서 잔뼈가 커온 장돌뱅이와의 경쟁은 다윗과 골리앗 이상의 싸움이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처음에 잘 나가는 듯 하니까 경영권을 쥔 후배가 자꾸 판을 키우는 거예요. 그러던 회사가 판매부진이라는 암초에 걸리자 후배는 많은 고민을 했어요. 결국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어요. 참.”

“인생 2막 수업료치곤 혹독한 편이네요.”

“그렇죠. 그러나 부도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어요. 사람이 죽은 겁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었죠. 어느 날 아침인데 공장이 조용하고 후배가 안 보였어요.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아줌마가 ‘엄마야!’하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거예요. 후배는 경영상의 고통을 못 이겨 새벽녘에 자살을 한 것입니다.”“비극이군요.”

“저는 아직도 죽음의 그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극단적인 결행을 했겠습니까마는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그 후 혼자 방을 얻어 살면서 창고지기 등으로 근근이 살았지요.”

“충격적인 일을 당한 뒤 공항증세 같은 것 없었습니까.”

“많지요. 삶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서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했어요. 삶과 죽음, 인생무상(人生無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등이 주요 화두였어요.”

“상당히 철학적인 화두들이네요.”

“일단 일하는 것보다도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해야만 했어요. 그때 대학 서클 선배이자 자연식 연구가인 M선배가 운영하는 명상수련원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대학 후배의 배신

 

Y씨는 퇴직 후 5년 동안 많은 세상 경험을 하면서 실망과 불신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월급쟁이로서 온실생활을 해오다 갑자기 야생으로 내던져진 느낌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입니까.”

“사람이요. 인간이지요. 참으로 징글징글한 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보면 80~90%가 모두 사기라는 겁니다. 백수시절 몇 년 동안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제안했던 사업 내용을 곰곰 생각해보면 ‘이용해 먹겠다’는 것이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퇴직자들이 퇴직금을 날리는 것은 답답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기꾼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아닐까요.”

“대중가요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물론입니다. 가까운 사람들만 보더라도 각인각색이지요. 남에 대한 배려가 깊은 성숙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사 부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소아적인 사람도 있지요. 허나 저는 당한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사람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일단 ‘모두가 다 그렇다.’라는 선입견부터 버리시는 게 어떨지요.”

“나중에 분이 좀 가라앉으면 그럴 날이 있겠지요. 저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다 보니 불신의 안경을 끼고 볼 때가 많지요. 잘못된 거겠지만.”

그러면서 Y씨는 후배의 배신 이야기를 꺼냈다.

“후배가 배신했다는 건 무슨 이야기죠.”

“아하, 그 녀석, 그 치사한 녀석, 아냐 불쌍한 녀석이지. 너나 나나 모두 다 불쌍한 중생들이지. 안 그래요.”

“후배와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대학후배인 그 친구도 대기업 출신이에요. 폐비닐 가공공장을 했는데 경영이 어려워지자 이 친구가 어느 날 야반도주를 해버렸단 말입니다.”

“왜요.”

“부도가 난 거지요. 그동안 한 솥밥 먹던 공장 식구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간 것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저는 공장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검댕이를 뒤집어 쓰면서 도와주었는데 월급도 한 푼 못받았어요.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들도 모두 하늘만 쳐다보는 신세가 됐구요.”

“불행한 일이지만, 오죽했으면 그랬겠나요.”

“그때는 그런 용서와 이해의 마음을 가질 수 없었어요. 피해당한 당사자로서 관대함은 호사가들의 사치스런 생각이었을 뿐이죠.”

“가는 곳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네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네요.”

“그래서 그를 찾으러 다녔습니까.”

“아니요. 찾아봤자 뭐합니까. 나중에 수소문해보니까 어디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근데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할 겁니까. 포기했죠.”

한 푼이라고 벌어서 생활을 해야 할 처지의 Y씨는 몇 년전 일이었지만 잠적한 후배에 대한 실망감에 치를 떨었다. 이러저러한 충격으로 그는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갔다.

 







‘나의 구세주, 명상수련’

 

Y씨는 대학후배이자 동업자가 자살하고 또 다른 후배가 야반도주하는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한동안 심한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일에 대한 의욕도 없고, 먹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인생의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명상과 걷기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인생에 대한 회의’에 잠겼었고 참 인생에 대해서 정말로 알고 싶어졌다. 그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시켜준 것은 바로 명상수련과 걷기였다.

“당하고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가엾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말이죠. 도저히 평상심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후배는 왜 죽었을까.’ ‘얼마나 못이길 고통이었으면 목숨까지 끊었을까.’ 그리고 모두 다 내팽개치고 야반도주한 후배가 미웠다. 그리고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하릴없이 아침부터 술을 마셔댔다. 그런데 술이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산 좋고 물 좋은 산골짜기에서 마시는 술은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후배와 대화도 많이 했지요. 그리고 도망간 후배에 대한 미움도 커졌구요.”

“그랬었군요.”

“그때 인생에 대한 회의감,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고 죽는가. 가장 절실한 질문에 대해서 아무에게서 답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선배 M이 운영하는 명상수련원을 자주 다니면서 점차 의혹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수행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날씨와 같다는 겁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사계절이 찾아오고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조화로운 일정한 법칙일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것 또한 소아적인 차원이겠지요. 특히 선배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 마음 속에 쌓여있던 한과 원망, 분노 같은 것이 슬슬 녹아버리는 느낌 때문에 명상수련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리고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게 맞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적 가치관이 몸에 배인 것 같은데, 혹시 어떤 종교와 인연을 맺었나요.”

“아니요, 집에서 종종 불교방송을 시청하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과 ‘공(空) 사상’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지요. 불교에서는 ‘삶의 진리는 참선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아귀다툼의 중생들 틈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신적인 도그마로 압박하고 강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권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가톨릭도 그랬구요.”

“퇴직 후에 친구 3명과 취미생활, 종교생활 등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위의 3가지 조건 중에 종교생활에 좀 소홀했는데 기본적인 철학을 접하면서 정신건강이 많이 좋아짐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갖는다고 하지요. 그럼 앞으로 불교 쪽으로 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불교도 가톨릭도, 예수교도 아닙니다. 다만 종교방송을 보니까 편해지고 자꾸 보다보니까 뭔가 머리를 툭 치는 게 있더라는 거죠. 그것이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공(空)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쁜 나머지 한 잔 술을 하곤 합니다.”

“술을 마신다? 좀 이상한 상황이네요.”

“네 경건해야할 시간에 술을 마신다는 자체가 불경스러울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일단 좋고 관심이 있어서 동참하는 것이고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이 나쁜 행위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이해해주세요.”

“종교방송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나요.”

“예, 조금요. 사실 그동안 많은 궁금증이 있었는데 거의다 풀렸어요. 앞만 보고 달려오던 출세지향적인 생각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욕심을 부렸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생 전반기의 삶과 후반기의 그것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젊고 패기만만할 때는 도전의식이 필요하겠지만 인생 2막을 열어갈 때는 조금 속도를 낮추고 성취할 것을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이지요.”

“그래서 참 삶의 의미를 찾았나요.”

“조금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게 자연의 은혜로운 법칙이라는 것쯤은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생로병사가 왜 생기는지 알지 못했거든요. 아니 알려고도 안 했죠. 아니 알 필요도 없었어요.”

“명상을 하면서 예전과 달리 인생관이 바뀌었나요.”

“예. 좀 바뀌었습니다. ‘인생은 별 거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살다가 가자.’는 겁니다. 좀 단순 무식하지요.”

“그것도 자신의 입장이라면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런데 허무와 향락이 섞인 것 같은 느낌이네요.”

“아닙니다. 해탈을 했기 때문에 얻은 것은 더 더욱 아니구요. 그냥 잘 먹고 잘 지내고 잘 살다가 가면 된다는 의미이죠.”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그냥’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오늘 친구만나서 김치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 좋은 것이고, 그냥 내일 사람 만나서 부딪치며 사는 것도 좋은 일이고, 그냥 평소 먹고 싶은 생태 사가지고 매운탕 끓여서 소주 마시는 것도 좋은 것이죠. 바로 그런 ‘그냥’입니다.”

“‘그냥 철학’이라고 할까요.”

“네, 쑥스럽네요.”

명상의 요체는 ‘마음 비우기’다. 97년 IMF 위기사태 이후 세상이 어려워지자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관련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왔다. 명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Y씨는 언뜻 생각나는 책으로 인디언 소년을 주제로 한 ‘리틀 트리’와 ‘이 순간을 즐겁게’ ‘과거를 다스려라’ 등을 꼽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리틀 트리’는 인디언 소년을 통한 육신의 덧없음과 영혼의 영원함, 육신의 죽음은 또 다른 생의 시작 등 자연의 순리를 담고 있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명상수련원을 하는 대학 서클 선배 M씨를 자주 찾아 대화하고 명상수련을 하는 통에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선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니 제 가슴 깊숙이 숨어있던 회한과 얽히고설킨 갈등이 하나씩 풀려나가기 시작했어요.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하나.’하는 억울한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걸 느꼈던 거지요. 마음의 상처가 점점 치유되면서 ‘세상만사는 무상(無常)이고 공(空)이다.’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편한가요.”

“네 욕망을 좀 줄이면 그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고 할까요. 그래 이만큼 내 가정이 영위되고 나 또한 할일이 생겼으니 그 아니 행복하지 않은가하는 마음이지요.”

“욕망과 기대를 줄이면 행복감은 더 커진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그래요. 퇴직 후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하는 바람에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천방지축으로 뛰었습니다. 욕망을 채우려다 그만 아무 것도 손에 쥔 게 없어요. 좀 찬찬히 욕망을 줄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더라면 하는 회한이 듭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둘러가라는 속담이 있는 모양 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퇴직을 하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여태까지 생활하던 기본을 영위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죠. 수입은 없어지고 고정적으로 나가야할 경비는 있는 것이고, 가장으로서 체면과 주위의 눈총이 따가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동안 호의호식 하던 생활습관도 고쳐보지만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에요. 제가 명상을 찾게 된 것도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명상에 의한 치유효과를 봤습니까.”

“완전 치유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효과를 봤습니다. 퇴직 후 처음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네 탓’이기보다는 ‘내 탓’이다 라고 생각하니 편해졌어요.”

“‘네 탓’을 ‘내 탓’으로 돌렸다면 한 단계 올라간 것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속담에도 있다시피 ‘잘 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습니까. 과거의 저는 일이 잘못되면 남 탓을 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었던 거지요.”

Y씨는 명상과 철학 등 정신적 사유의 소재가 나올 때마다 진지해졌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궁금증을 그 안에서 찾았다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한 듯 했다. 그는 여태까지 보여준 것처럼 종교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경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많이 비웠습니까.”

“아니 그 수준은 아니고요, 세상만사 변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는 인생무상이 많은 위안을 주었어요. 무상한 것인데 뭐 그리 아둥바둥 가지려하고 미워하고 할퀴고 뜯고 상처받고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는 겁니다.”

“도를 깨트린 것 같습니다.”

“아니요, 그 얘기 말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 드릴께요. 저보고 ‘소가 되어 버린 게으름뱅이’라고 한 친구가 있었어요.”

“소가 되어버린 게으름뱅이라니요.”

“백수 2년 차 이야기인데요, 백수라지만 완전 백수는 아니고. 식품가공공장에서 일 할 때인데 일 끝나면 곧잘 서울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곤 했어요. 한 친구가 저에게 그래요. ‘너의 다음 생은 토종 한우’일거라고 말했어요.”

“토종한우?”

“하루 종일 축사에 갇혀서 풀과 사료를 먹고 되새김하는 누렁이 말입니다. 회색도시에 갇혀 일 없이 맨 날 술만 먹고 움~ 메에~하기 때문이라나요.”

“누렁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이롭기 않나요. 좋은 별명이네요.”

“원래 제 별명은 뽀빠이였어요. 그런데 또 하나 얻은 거지요.”

“뽀빠이라면?”

“네 고교와 대학에서 역도반 활동을 했어요. 그땐 근육이 울퉁불퉁했고 앳된 얼굴이 영락없이 동굴동굴한 뽀빠이를 닮았던 모양이에요. 지금은 그런 모습이 다 사라졌지만.”

“아 그렇군요.”

명상을 수련할 즈음 Y씨는 동호회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하늘이시여,

굽어 살펴 주시어

부디 영광의 새해를

모두 함께 맞이하도록 도와주소서.

사실 그동안 제가 즐거움에 취해 배려와 사랑의 정신을 놓고 산 것은 아닌지.

올해 한해도 소원성취들 하시게. 뽀빠이 올림.’

 

걷는 취미

 

퇴직자가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아침에 해가 떴을 때 가야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늦잠이라도 잔다면 여지없이 아내로부터 따발총 같은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신망을 얻었던 장관 출신의 한 인사는 퇴직 후 거실 소퍼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던 아내로부터 “청소하게 발 좀 치워요!” “그렇게 나갈 데가 없어요?”라는 지청구를 듣고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바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의 남자, 한자로 남(男)은 밭 전(田)에 힘력(力)이 합쳐진 꼴로 보아, 들로 나가서 밭을 가는 게 자고로 남자의 역할이다.

동창에 해가 떠오를 때마다 가야할 곳이 없는 것은 ‘돈 못 버는’ 퇴직자들이 겪는 또 다른 고통의 다름 아닐 터이다.

Y씨 역시 오도 갈 데 없어 고통을 겪던 차에 동업, 협업, 친구 사무실 등을 찾아다니면서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의 방랑생활을 5년씩이나 했다.

그때 그는 자꾸 약해지는 체력을 보강할 겸 어지러운 머리를 식힐 겸 해서 걷기를 시작했다.

“혼자서 많이 걸어 다녔어요. 예를 들어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다고 하면 한 2시간 정도 걸어서 가곤했어요. 또 시내에서 모임이 끝난 뒤 경기도 집까지 걸어갔던 적도 있어요.”

“걸으면 좋아지는 게 뭐가 있나요.”

“걷는다는 것은 머리를 맑게도 하지만 운동도 되지요. 일석이조의 효과적인 행위이지요.”

“걸을 때 어떤 생각을 하세요.”

“네, 명상 수련을 할 때 가졌던 화두를 하나씩 잡고서 걷는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 ‘삶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걷는다는 것은 세상을 구경하는 겁니다. 거기에 모든 인생의 이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때론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느끼기도 하지요.”

“걷기가 취미라면 등산도 많이 했을 텐데요.”

“종종 친구들과 도봉산이나 북한산, 수락산 등지를 올랐어요. 하지만 저는 기를 쓰고 산을 정복하는 편이라기보다는 평탄한 구릉지나 둘레 길을 걷는 걸 더 좋아해요.”

“걷기가 무료한 삶을 구원해준 셈이군요.”

“그랬습니다. 백수 시절 주먹밥을 몇 개 싸가지고 집 뒷산에 올라가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어요. 특히 명상체험을 많이 했어요. 올라 가다보면 약수물도 만나고 고라니도 만나고 나무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도 맡을 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평소 알코올로 찌든 몸도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적이 감도는 산에 혼자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혼자라는 외로움과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절대 고독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또 청명한 산새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과 인생에 관한 화두에 좀 더 몰입할 수도 있어요. 그런 고요함을 느끼고 나면 딱히 뭔지는 몰라도, 자연의 위대한 이치에 머리가 절로 숙여지곤 합니다.”

명상이니 걷기, 산책 등은 바쁜 현대인들의 지친 영혼과 육체에 휴식을 주는 치료효과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근 제주의 올레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는 둘레길, 해안길, 계곡길 등 갖가지의 길이 개발되고 있는데서 긍정의 철학을 얻으려는 시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앞으로 희망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요.”

“지금껏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뛰어온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앞으로 인생 2막은 보다 천천히 걷고, 보다 찬찬히 세상과 사물을 들여다보면서 사는 ‘느림의 철학’을 가지고 싶어요.”

“걸으면서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면, 그 또한 행복의 조건이 되겠네요.”

“네 특히 원망과 시기심이 일어날 때 남 탓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제 인생의 결과는 저 스스로 만든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그러다보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포용력도 생기게 되지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사람에 따라 눈물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Y씨는 어린 시절 가난한 살림살이를 맡았던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45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를 가장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그후 제가 제대로 모실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눈을 감았단 말씀입니다. 인생사란 항상 뒤늦게 후회만 남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눈물은요.”

“인생의 극한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그랬죠. 회사가 없어지면서 ‘패잔병’으로 전락했을 때도 대성통곡했어요. ‘내 뭘 잘못했기에?’라는 억울한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백수가 돼서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기에 역부족이라고 느꼈을 때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습니다. 백수생활 5년 동안 ‘개고생’을 탈피하려고 온갖 일을 도모하다가 모두 물거품이 됐잖아요.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다보니까 제 자신이 싫어서 눈물을 흘렸던 때가 많았어요.”

“주로 슬픔을 어떻게 삭입니까.”

“저는 주로 혼자서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삭여왔어요. 소주잔에 눈물을 담아서 먹은 셈이지요. 또 무작정 걷기, 등산 등입니다.”

“속상하다고 매일 같이 마시다보면 건강은 괜찮습니까.”

“속이 뒤집힌 적도 많았어요. 한 30년 이상을 마셔댔으니까요. 희망퇴직 후 매일 퍼마시다가 그만 위경련 증세가 발동했던 적도 있어요. 위장약인 겔포스 한 봉지 입에 털어 넣고 녹차 한 사발을 다 마셔도 시원하지 않았어요. 등산이나 뒷동산 산책을 하다보면 약수물이 있잖아요. 아마도 그 약수 덕에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 같아요.”

“체질이 어느 정도 받아주니까 견뎠겠지요.”

“그건 그래요. 대학 때부터 운동부 클럽에 들어가서 술을 무진장 마셨어요. 군대생활때 헌병대에서, 자취생활, 취직해서 영업부 활동으로 거래선과 소통하느라 술을 참 많이도 마셔댔지요.”

“술에는 장사가 없다 잖아요.”

“그래도 즐거워서 한잔, 울적해서 한잔으로 살아가요. 그게 제 즐거운 낙입니다.”

“그러면 집에서도 자주 하십니까.”

“절제만 한다면 혼자 마시는 술도 맛있어요. 명상할 때 가끔씩 종교방송 보면서 한잔 하긴 해요. 그리고 ‘가요무대’를 보면서 홀짝홀짝하지요. 아마 나이가 드는 모양입니다. 흘러간 옛 노래에 얽힌 사연과 추억이 하나둘씩 생각나는 걸 보니 말입니다. 그리고 노화 현상 일 텐데 누선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지난 언젠가 최민수가 아버지로 나온 드라마인데 아버지의 내면심리를 잘 그려냈어요. 미국 유학 보낸 아들이 갱단의 일원이 돼 돌아왔지만 끝까지 아들을 보듬는 부정(父情)에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돌아온 탕아’를 껴안는 그 거룩한 모습 말이죠.”

그렇다. 술은 가끔씩 외로움의 진정한 벗이 될 때가 있다. 그는 술을 친구삼아 외로움을 견뎠다. 그리고 술을 통해서 인생의 고난을 헤쳐 왔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인연이란 참 묘한 겁니다.”

“무슨 인연이요.”

“괴로운 인연이지요. 아 글쎄, 미군부대로 출퇴근하려면 꼭 넘어야하는 고개가 있어요. 지름길이면서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애용하는데 글쎄 폐비닐공장을 부도내고 도망간 후배가 고개 꼭대기의 어떤 카페에 자주 들른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찾아간 적이 있나요.”

“없어요. 찾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야반도주했을 라구요. 여튼 그 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답니다.”

“그럼 딴 길로 다니면 안 됩니까.”

“글쎄요. 그것도 인연이라 눈꼽 만큼의 애증이 남아있어서 일까요. 그 길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언젠가 내가 영원히 돌아갈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상당히 로맨틱하네요. 미국의 어느 교수가 말하는 ‘자연 친화 지능’이 상당히 발달된 것 같네요.”

“어느 정도 맞습니다. 제 DNA엔 ‘자연 친화’ 같은 게 있어요. 복잡한 도심보다 한적한 시골이 더 좋으니 말입니다. 길도 좋고 산도 좋고 나무도 좋고 풀도 좋고, 바위도 좋으니 말입니다. 하하.”

“그럼 앞으로 그쪽 길로 가겠네요.”

“네, 나중에 시골에 집 한 채 마련해서 텃밭 가꾸고 친구들 불러서 드럼통에 돼지고기 구워먹는 게 제 꿈이에요.”

“명상수련도 했고 자연 친화적인 DNA도 가지고 있으니 도망간 후배를 용서해주세요.”

“벌써 용서했습니다. 나중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는 이제부터는 조금 덜 벌어서 적게 먹고 사는 데서 행복을 찾겠다고 했다.

“안빈낙도(安貧樂道)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여기서(Now Here) 순간을 최대한 즐겨라’라는 카르페 디엠 철학에 대해서 너무 향락적이라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놀이본능이 있기 때문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ce)’, 즉 노는 인간으로서 역할도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카르페 디엠을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 카르페 디엠을 인생관으로 삼았습니까.”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도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만으로도 고맙고 즐거운 거죠.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최대한 즐겁게 산다면 인생 전체가 다 핑크빛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측불허의 인생사에서 언제나 즐거운 순간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즐거운 마음이라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거지요. 긍정이냐 부정이냐, 사람과 사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만 품는다면 서로가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카르페 디엠 정신이 생활 속에서도 구현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볼게요. 지난 5년 동안 경제난을 겪은 저로서는 지금 월급 200만원을 받는 이 생활이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일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결과적으로 충성도가 높아지게 마련이지요. 현재 근무하는 데서 아주 즐겁게 사는 것,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지요.”

“월급 지출 명세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저는 하루에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 그리고 밥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골프를 치는 것으로 행복감을 만끽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모아놓은 돈으로 아들 원룸을 얻어주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게 다입니다.”

“고령화 시대의 일원으로서 현실적인 수입이 막힌다면, 더 이상 카르페 디엠은 없는 것인가요.”

“아니죠. 현재의 삶에 더 충실 하는 게 바로 행복의 조건이라고 봅니다. 다가올 미래의 걱정을 앞당겨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물질을 가지고 말하니까 그런데 물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때 가서는 또 다른 행복거리가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미리 사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네요.”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죠, 한동안 샐러리맨으로서 잘나가는 ‘범털’ 생활을 하다가 백수가 되면서 ‘개털’ 인생을 전락했잖습니까. 그때 밑바닥 체험을 하면서 고통과 번민 등으로 한방에 해결해준 게 명상공부였습니다. 명상공부 덕택에 사람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하하하.”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물질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어려울 텐데요.”

“그거 그렇지만 물질의 빈 공간을 정신으로 채우면 되는 겁니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지금도 이 순간 여전히 행복하세요.”

“네 행복합니다. 연봉 1억원이 넘는 대기업 임원 친구를 만나서 물어보면 용돈이 1백만원이래요. 그러면 저는 ‘월급 200만원이 모두 내 용돈이다.’라고 하면 부러워해요. 사실 누가 누굴 부러워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연봉 1억원이 안 부럽습니다.”

“골프도 취미이지요.”

“네 제 수입에 월 1회 골프 치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인생이란 소풍이라고 생각해요. 소풍 나온 이상 주어진 환경에서 실컷 놀다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보물찾기에서 뭐 좀 찾으면 좋은 것이고.”

 

죽어서도 영신(英神)이 되고 싶다?

 

Y씨는 50줄에 들어서 영어공부에 올인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왜 ‘왜 그 나이에 영어공부를 하려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영어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한다는 게 언뜻 와 닿지 않는데요.”

“네, 백수 시절 혼자서 산을 다닐 때가 많았어요. 어느 날 ‘내가 남보다 나은 게 뭐가 있지?’ 이런 생각이 문득 드는 거예요.”

“정말 남보다 잘 하는 게 뭐가 있나요.”

“글쎄요, 조용히 생각해보니 뭐 특출 난 게 없어요. 정말 초라해지더군요. 그래서 다시 역도반 시절을 회상하면서 근육운동을 시작할까, 성형이라도 해서 꽃미남으로 남을까, 머리숱을 검게 만들어볼까, 온갖 망상에 사로잡히다가 그래. 그래도 이 나이에 도전해볼 만한 것이 영어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영어공부입니까.”

“네 영어는 고교 때 교과서는 기본이고 ‘정통종합 영어’를 세번 독파를 했고, 일본 동경대 수험문제집 등을 공부해서 영어시험에는 도사였어요. 그런데 회사취직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보니까 영어와 담을 쌓아버린 겁니다. 회사생활도 국내 영업직으로 주로 근무해서 영어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왔고...”

“그래서 자기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 영어에 목숨을 걸었나요.”

“그렇죠. 나이 한 살 더 먹기 전에 영어를 쪼개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쪼개기 시작했나요.”

“예, 백수니까 남는 건 시간이 잖아요. 아침에 귤 몇 개하고 주먹밥 준비해서 뒷산의 아지트로 향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명상을 끝내고 영어 테이프를 듣는 거예요. 한번에 두세시간씩, 오후에 집에 내려와서는 아리랑 TV 등 영어방송을 크게 틀어놓아요.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테이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쏼라! 쏼라!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흘러간 추억의 명화를 보면서 영어공부를 했어요.”

“늦은 공부가 제대로 잘 되었습니까.”

“기억력이 예전처럼 회복이 안 되었지만, 언어공략은 반복학습을 통한 꾸준한 노력이 주효하지 않습니까. 차츰 시간이 갈수록 귀가 뚫리고 입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영어공부와 관련, 우리는 유교적 전통문화에 젖어 살기 때문에 낯선 외국인에게 선뜻 다가가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회사근무 때 아프리카에 출장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너무나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거예요. 물론 식민통치를 받아 공용어가 됐겠지만, 그때 괜한 ‘열등감’에 빠졌던 기억도 있어요.”

Y씨는 ‘영어도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한 뒤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토익점수가 바로 자신의 영어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All I do nowadays is to study English for being God of English.’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그는 영어공부를 하다가 노트에 감명 깊은 대사를 적어놓았다.

‘로마의 휴일’ 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의 아름다운 대사도 그 중 하나였다.

“keep in mind that life is not always that one likes”(기자로 출연한 그레고리 펙의 대사.)

“I will cherish my love in my memories as long as I live.”(공주로 나온 오드리 헵번의 대사.)

또 IQ 75의 지적 발달장애를 가진 주인공으로 출연한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명대사를 뽑았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ing to get.”(살아가면서 어떤 초콜릿을 집을 지 알 수는 없지만, 목적이 있는 삶이라면 분명 원하는 초콜릿을 집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한 교훈의 문구도 노트에 적어놓았다.

‘Please, clear away the past. make today special.’

‘look at your surroundings. what's really important?

be grateful for everything.’

“그렇게 하다 보니 영어 신의 영역에 근접하던가요.”

“뒤늦게 시작한 영어공부이니 만큼 최선을 다하자 였어요. 토익시험도 봤어요.”

“몇점이 나오던가요.”

“처음에 봤을 때 580점이 나왔어요. 허허. 1년 동안 공부한 게 그 점수밖에 안 돼서 섭섭했어요.”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잖아요.”

“아, ‘나이는 못 속이는구나.’하는 한탄을 했지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던 어느 날 퇴직자 동료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미군부대 취직자리가 있는데 응시해볼 의향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토익 550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친구는 제가 영어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든요. 말할 것도 없이 오케이했지요.”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온 거군요.”

“네 백수탈출의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바로 그 속담이 맞아떨어진 겁니다.”

“기쁘셨겠습니다.”

“그렇죠. 일단 돈이고 뭐고 우선 당장 되면 다닐 데가 있다는 것과 이 나이에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뻤던 겁니다. 요새 50줄에 이력서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 60세에 영어배우는 사람을 팔불출 이라고 부른다지요.”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언젠가는 꼭 영어의 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취업, 미군부대 보안경비원

 

퇴직 후 방황하던 그는 눈높이를 낮추고 일자리를 찾았다.

그가 미군부대에서 하는 일은 게이트 출입자 관리 및 거수자(거동수상자) 색출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30여 년 전 육군헌병으로 근무할 때와 거의 비슷한 일이어서 낯설지 않았다. 다만 매일 상대해야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미국인 병사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한때 영어의 신이 되고 싶어서 뒤늦게 영어공부를 했던 그에게 어쩌면 아마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인지 몰랐다.

“한치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영어와의 인연도 그렇고 헌병생활을 했던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근무조건은 어떠세요.”

“월급은 200만원이고 하루 12시간 근무 후 다음날 비번으로 집에서 쉽니다. 항상 새로운 일이 기다려져서 재미있어요. 만족합니다.”

그가 미군부대 근무를 하면서 한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0대 초중반 초로의 엘리트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이었다. “제가 이 자리로 올 때도 주위에서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는데, 와서 보니 전혀 딴판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국내외 은행지점장, 대기업 간부 출신들이 있고 특히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어서 놀랐어요. 우리 사회가 수용하지 못한 전문가 그룹이 뒤늦게 인생 2막을 여기서 시작하는 겁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오늘날 이 시대의 리얼한 자화상이네요.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네 인생 2막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젊은 친구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는 겁니다. 청년실업이 실감납니다. 사실 젊은 친구들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뜻을 펼쳐야하는데 말이지요.”

“특이한 환경에서 근무하다보면 에피소드도 많을 텐데요.”

“부대를 순찰하다 보면 60대 할머니인데 가끔 가다 햄버거와 콜라 등을 건네주곤 해요. 그 옆에서는 퇴역군인인 백발이 성성한 흑인노인이 거들고 있구요. 보기 좋은 부부의 모습이지요. 고교 때 본 영화 ‘골든 폰드’에서 뷰티플 실버들이 펼치는 로맨스 그레이! 바로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할머니에게도 탱탱하게 젊고 아리따운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묘한 기분이라니요.”

“인생유전에 대해서요. 이 시대 베이비 부머들도 시대의 산물이지만 미군을 상대로 연명했던 그 당시 여인들도 시대가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또 재미있는 이야기 없나요.”

“게이트를 지키다보면 에피소드가 많지요. 한번은 술에 만취한 흑인 여자 병사가 제 가슴에 파묻혀 흑!흑! 거리는 거예요. 눈물, 콧물이 흘려내려 제 옷이 다 젖도록 말입니다. 고향생각이 난 것인지 애인과 헤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저는 계속해서 ‘Don’t cry lady!’만 연발할 따름이지요. 동료들은 좋았겠다고 농담을 했지만요.”

“지옥과 천당이 모두 사람 사는 곳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이야기는요.”

“부대 문을 닫는 시간을 커퓨 타임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허겁지겁 뛰어오는 군인들을 보면 가관이지요. 늦으면 벌점이나 감봉을 받거든요. 그러니 가끔 담치기 하는 군인도 나옵니다. 어떤 꼴통미군은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퍽큐! 가드’라는 욕설을 퍼부을 때가 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떡하겠어요.”

“글쎄요.”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땡큐!’로 답합니다. 그러면 천하의 꼴통도 제풀에 죽게 마련이지요. 명상할 때 배운 거예요. 하심(下心)을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하.”

“정말로 시비가 크게 붙을 일도 있겠네요.”

“그런 때는 복무규정상 헌병대로 이첩하면 됩니다. 헌병대에는 ‘Do I look like I am kidding?’이란 문구가 달려있는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헌병대에 들어온 이상 ‘함부로 까불지 마라.’입니다. 또 ‘얌전하게 굴어라.’는 뜻이죠. 참 재미있죠. 사람 사는 게 어느 곳이건 간에 다 비슷합디다. 하하하.” <끝>

'문화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 Focus - 이세중 변호사  (0) 2016.08.09
CEO 감성인터뷰 - 고정균  (0) 2016.08.09
VIP 인터뷰 - 장사익  (0) 2016.08.09
김영재 사진작가 (CEO 감성 인터뷰)  (1) 2016.08.09
VIP 인터뷰 - 최진실  (0) 2016.08.09